[아무튼, 테니스], [2인조], 그리고 [홍상수]
[아무튼, 테니스] 팡팡, 책이 내 마음과 잘 맞는 소리가 났다. 읽으며 스스로에게 솔직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솔직한 에세이에는 그런 힘이 있다.
테니스는 정신적으로도 꽤 도움이 되는 운동인 듯하다. 저자의 성찰에서 엿볼 수 있다. 책은 시종일관 담담하게 테니스를 예찬하는 듯하다만, 가벼운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라켓을 들고 서 있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긴장됐다. 갑자기 들어오는 발리공격 같은 페이지를 받아낸 뒤에 코트 맞은편을 바라보면, 상냥하게 코치처럼 토스해 주던 손현 님은 없고 내 자신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대목은 두 부분.
"2021년을 돌이켜보면 네트 가까이 서서 발리 동작을 하는 마음으로 보냈던 해였다. (중략) 반대편 코트에는 누가 있었을까. 주로 양실장과 송이가 있었고,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있기도 했다. 간혹 나 자신이 반대편에 서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펼친 경기가 가장 힘들었다.(손현, 『아무튼, 테니스』, 2025)"
“그러나 자신이 네트 너머의 상대를 좋아해야 마음이 더 편안해지고, 그래야 최상의 경기력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손현, 『아무튼, 테니스』, 2025)"
이내 문득 이석원 작가의 [2인조]가 생각나 책장에서 꺼냈다.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2인조이기에 그 못난 나 자신을 늘 지켜주고 사랑해 주길 당부하는 일기 형식의 에세이, 다시 읽어도 솔직해서 고마운 글 꼭지들. 작가는 몸소 그렇게 솔직해질 것을 제안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편안함은 어디에서 오며 나를 사랑하는 법은 무엇일까. 지금 그 모든 것에 대한 나의 답은 하나다. 솔직함에서 온다. 솔직할 수 있는 자유로부터. 남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부터.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로부터 (이석원, 『2인조』, 2020)”
솔직한 책들을 읽으며, 솔직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솔직한 걸까. 구라를 잘 치는 사람이 입에 달고 다니는 부사가 “솔직히”인걸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얼마 전 보았던 홍상수 감독의 옛날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예술가 폴 세잔을 늘 언급하던 시절의 글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몇 십 년간 수백 개의 사과 그림을 그렸던 그 화가가 추구하는 철학에 대해 떠들던 이야기다. 당시엔 지금처럼 과묵하지 않았다.
“구상 뒤에 빈약한 추상을 숨길 필요 없다. 솔직하게 추상을 드러내며 구조를 만들어도 완전한 구상이 될 수 있다.” (홍상수, 영화인 7인 특강, 2005)
그는 최근 공식석상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저는 항상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로 실험을 해왔었는데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 중 한 가지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NYFF55-Directors Dialogue, 2022)”
https://www.youtube.com/watch?v=ZRilD3fOGIc
‘솔직하다’의 유의어 사전을 찾아본다. 네이버 사전이 시원치 않아서 워드넷 유의어 사전을 유료결제할 강력한 명분이 되길 기대하며,
- 진솔하다 : 진실하고 솔직하다 (뭔가 고백해야 될 것 같다)
- 순수하다 :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 (이런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 간솔(簡率)하다 : 단순하고 솔직하다. (빙고, 이거구나!)
우리가 세상을 단순하고 솔직하게 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경우를 살펴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신경 쓰며 늘 자아를 부풀린다. 수만 명 타인이 나를 보며 할 생각을 늘 제 멋대로 상상하고 정의 내린다. 모든 기대에 부응해 보려 애쓴다. 잘 될 수가 없다. 늘 불안하고 괴롭다.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평가는 늘 흐린 눈으로 미뤄둔다. 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인정 못하고 있는 건 어쩌면 나 자신뿐이다.
“세상이 나를 그렇게나 신경 쓴다고 여기는 게 얼마나 큰 자의식 과잉인지를 (이석원, 『2인조』, 2020)”
답은 무엇일까. 상대를 신경 쓰느라 바빠서 정작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마음가짐은 변할 수 있을까.
[아무튼, 테니스]에서는 입스를 극복한 미국 테니스 선수 마디 피시의 이야기를 소개해준다.
*입스(yips) : 압박감이 느껴지는 시합 등의 불안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근육이 경직되면서 평소에는 잘하던 동작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허술한 바와 같이 본래 골프를 통해 유명해진 용어이지만, 최근에는 테니스, 야구와 같은 타 스포츠에서도 자주 쓰인다.
"역설적으로 피시는 이(강인한 정신력으로 투지를 불사르는 행위)와 정반대로 행하면서 서서히 불안과. 우울을 수용하며 입스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의사, 아내, 가족, 친구들에게 내 기분에 대해 얘기하니까 기분이 나아졌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약점과 두려움을 표현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게 정말로 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손현, 『아무튼, 테니스』, 2025)""
하루에 미량으로라도 간솔해질 것임을 다짐하고 있는 요즘이다. 일단 불안을 수용하기로 했다. 치가 떨릴 줄 알았으나 의외로 나쁘지 않다. 물론 조금 겸연쩍긴 하다. 쑥스럽고 왠지 나한테 미안하고 어색하기까지 하다. 현재에 집중하려고 감탄도 괜히 자주 해본다.
얼마 전에는 내가 쓴 일기를 모아 편지 형식으로 갈무리도 해보았다. 세상을 간솔하게 보는 것,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레퍼런스가 없다. 책에도 없다. 내가 봐야 의미가 있기에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 그게 궁금해서라도 내 자신이 보내는 날카로운 서브들을 받아보기로 결심했다. 심지어 못 받아내도 괜찮다고 여겨보기로도 했다. 그렇게 성찰에 기꺼이 헌신해 보기로 다짐했다. 물론 현실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란 건 자명하다. 그렇지만 정말 다행히도 알고 있는 명제가 있다. 이 과정이 사실 전부라는 것.
"진정한 자유는 구속과 해방 사이에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구속과 해방, 두 꼭짓점의 거리는 훨씬 더 멀어진 기분이지만 앞으로도 그 사이를 기꺼이 왕복할 생각이다. 테니스를 계속 칠 수 있다면. (손현, 『아무튼, 테니스』,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