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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Mar 10. 2020

필연적인 뒤틀림


 


 눈빛이 변했다. 얼마 전 우연히 찍힌 내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이다. 나는 작은 눈을 가지고 있는데, 빠이롯드 만년필로 찍어놓은 것 마냥 검은자위가 선명했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나는 다시 이런 눈을 갖지 못할 것이라 여겼었는데 말이다. 물에 잉크가 풀어지듯 마음이 동요했다. 최근 내 삶은 분명히 바뀌고 있다. 그래서 근래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 추이를 복기해보기로 했다.


 징조가 있었던 건 분명하다. 이상하게도 가슴속이 뭔가 간질간질했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종말이 곧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편이다. 고등학생 때도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던 것 같고, 제대 후 복학했을 때도 똥꼬 끝이 비슷하게 간지러웠다. 이렇게 살다간 망할 것 같은 본능적인 위험 감지. 그럴 땐 어지러웠던 생각들이 도리어 명료해진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계산 없이 그냥 움직이게 된다. 삶에 시동이 걸리는 순간이다.


 그 시작이 모호하기 때문에 거꾸로 올라가 보자. 내가 일단 이 토요일 아침에 우리 집 식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기이하다. 이렇게 뭔가를 쓰고 있는 이유는 얼마 전 수강했던 에세이 쓰기 수업의 잔재 때문일진데. 여하튼 매주 에세이 숙제를 하던 내 습관이 없어지는 게 아쉬웠다. 화요일마다 팀장에게 인사를 생략하고 스윽 퇴근해서 수업 들으러 가던 길은  행복했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가득했다. 에세이 강사님은 소설가였는데, 강좌를 열었다는 사실은 한 블로거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블로거는 카피라이터인데, 글이 담담하고 슴슴한 맛이 일품이라서 사무실에서 읽기 좋은 편이었다. 회사에선 보통 맵거나 짠 일들 투성이기 때문이다.


  블로거를 알게   역시 우연이었다. 그건 작년에 온에어 한 어느 광고가 너무 후지게 느껴졌음과 관련이 있다. 왜 우리는 2020년이나 되었는데도 성공을 강요받아야 하는지 화가 났던 그 광고는 마침 그 날 듣고 있던 카피라이팅 수업에서 보게 되었다. 이 수업에 대해 또 설명하자면, 요즘은 직장인들의 불안감을 미끼로 한 직장인 학원이 유행인 것과 관련이 있는데, 나 역시 거기에 걸려들어 하품을 하며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강사도 역시 직장인이었고 그 나름의 불안감에 이끌려 꾸역꾸역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나도, 학생들도, 강사도, 정말 바보들의 연극 같은 장면이었다.


 나는 한 때 꿈이기도 했던 광고일이 불안해졌기에 그 수업을 들었다. 나 같은 기업의 평범한 브랜드 매니저는 <범죄와의 전쟁>의 최민식처럼, 광고인이라고 불리기엔 애매한 '반달'이었다. 광고대행사 파트너들과의 관계들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팀 내에서도 고인물이 되면서 열심히 하기 싫어졌다. 주말만 기다리며 삶에 이끌려 걸어갔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는 별로인 사람이었다. 인생이 뒤틀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꼬이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기분의 시작조차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떠한 사건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사건을 종결시키는 개념은 인생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모든 분자 단위의 순간들이 꼭꼭 숨어서 현재에 영향을 줄 뿐이다. 나의 게으름이 한 스푼, 무기력이 한 스푼 추가된 세탁기 속에서 내 인생이 뒤틀리고 있었다. 탓할 거리만 찾으면서 말이다. 데미무어처럼 도자기 물레를 돌리다가 아차! 하고 망가뜨려버리기 전에 행복 회로를 돌려보기로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건 필연적인 뒤틀림이다. 나는 결국 이렇게 되려고 먼 길 돌아오듯 뒤틀려 온 것이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예쁘게 뒤틀려 올라가 듯이 말이다. 뒤틀린 망상과 헛생각의 즐거움을 놓지 않길 다행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위기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역시 내가 뒤틀린 마인드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분명한 건 글쓰기는 재밌다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들로 가득 찬 인생 속에서 나는 감정의 변비가 있었다. 글쓰기는 감정의 배설이었다. 이기적인 방향으로만 기억하는 나에겐 반성 노트이기도 하며, 자존감 약골인 나의 마음을 비추어보는 내시경이기도 하다. 뭐 그랬다. 글 쓰는 순간만큼은 다른 몰입감이 나를 대신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이 뒤틀림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 뒤틀리다 보면 귀여웠던 내 눈빛을 다시 찾겠지? 이러려고 돌고 돌아왔다면, 이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지나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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