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아 코로나
역병이 돌았다. 박쥐를 먹어서 생겼다는 변종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쳤다. 발병국의 최인접 국가인 우리나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항상 공신력이 있어 보이는 영국의 연구소는 결국 수십만 명이 이 병에 걸릴 것이라 예견했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마스크를 썼다. 가끔 ‘살기 싫다’를 입에다 달았던 나도 열성으로 마스크를 샀다. 처음에는 조금 답답했지만, 새로 산 구두 뒤축이 점점 무디어지듯 괜찮아져 갔다. 이젠 없으면 허전하다.
보통 감기에 걸려 타인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 쓰는 마스크는 배려다. 하지만 이런 역병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경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얼굴이 안 보이지만 표정들이 그때와는 다르다. 박쥐는 날개로 온몸을 숨기고 적의 동태를 파악한다. 지금 우리들이 그렇다. 우리는 모두 박쥐가 되어버렸다. 그러게 왜 중국 사람들은 박쥐를 먹었는가.
나는 지하철의 박쥐들 사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인류애를 바탕으로 이 박쥐들을 관찰해왔다) 마스크를 쓰니 역설적으로 시선이 자유로운 것이다. 얼굴이 가려지니 몸이 다 숨은 것 같이 느꼈다던 닭대가리의 일화가 생각났지만, 코와 입을 동원한 얼굴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으니 무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경계해도 된다는 명분까지 있지 않은가. 정당한 관음이다.
박쥐는(아니 인류는) 처음엔 조심스러움에 그쳤다. 손잡이를 안 잡으려고 발을 넓게 벌리고 중심을 잡거나 손대신 팔로 봉을 잡았다. 아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조용히 다른 칸으로 옮기기도 했다. 역병이 오래가니 다들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중심 잡던 그 사람이 휘청거려 몸에 닿으면 짜증을 섞어 밀쳐냈다. 조금이라도 아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들으라는 듯이 ‘집에 있지 왜 기어 나와 가지고..’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입모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역병에 지쳐 화를 낼 대상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정부를 중국인들을, 그리고 이제는 박쥐를(서로를) 경멸하고 있다. 이게 모두 마스크 때문이다. 익명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늘 그래 왔다. 예쁜 연예인은 싸가지가 없어야 했고, 정치인의 아들은 병역비리를, 부자들은 탈세를 했길 바랬다. 우리는 남 탓에 이렇게나 익숙하다. 그리고 마스크를 쓰면 이렇게나 용감하다.
역병의 결과는 표면적인 숫자 외에도 많은 것을 남길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쑤시면서 영혼을 죽였던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다.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닌데 말이다. 몇 년 전에도 역병이 돈 적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낙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역시 비슷했었다. 이번에는 조금 달라졌으면 한다. 브루스 웨인은 의인이 되기 위해 박쥐 꼴을 하고 고담시를 돌아다닌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을 탓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지는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