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에세이와 함께 - 5. 나는 씁니다.

by 홍유

날씨가 참 변화무쌍하다.


숨이 막히게 덥다가도 비가 쏟아지고, 비가 오다가도 갑자기 맑아지고 따뜻해진다. 해가 내리쬐는 날이면, 얼굴에 선크림을 꼼꼼하게 바르고 밖으로 나간다. 물티슈를 챙겨서 근처 공원으로 향한다. 황톳길을 만나면 양말을 벗어 가방에 넣고 양손에 운동화를 한 짝씩 잡는다. 건강에 좋다고 하니, 맨발로 걸어 봐야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뭇가지에 새순이 올라오는가 싶더니, 아침에 개나리에 파릇한 꽃눈들이 오종종 맺혔다. 벌써 봄이구나 싶어서 반갑다. 오후에 같은 길을 지나가는데,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났다. 한나절 만에 조르륵 피다니. 귀엽기도 하지.


벚꽃이 피어나는가 싶은데 비가 온다. 아깝다. 저 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예쁜데. 채 피기도 전에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니 속이 쓰리다. 그래도 비가 그친 후에 적당히 많이 남아 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남아 있는 애들이나마 만개하여 곱게 피고 가면 좋겠다. 길가에 핀 꽃이라도 주어진 생명 안에서 충실하게 살다가 간다면 피어난 보람이 있지 않을까?


바깥은 어김없이 계절과 시간이 피고 지는데, 내 글의 시간은 어떻게 피고 있을까? 글을 써야지 싶은 날, 글 씨앗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인다. 문득, 은유 작가님의 <쓰기의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 위에 뽀얗게 묻은 시간을 쓱쓱 닦아 내고는 아무 곳이나 펼쳤다. 글을 쓰기 힘들 때,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무언가 답답한 느낌이 들 때. 책을 골라서 무작정 펼치면 문장이 나온다. 책 한 권이 마치 포춘 쿠키를 가득 담은 쿠키통 같다. 가장 눈에 띄는 문장. 오늘은 그것이 주제가 된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나는 씁니다.
- 롤랑 바르트


절묘하게도 쓰기와 관련된 나를 찾는 질문이 나와 버렸다. (-이래서 이 방법을 좋아한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한다. 연구하고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연구자에게는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하고, 잘 갈무리해서 투고하는 일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글을 쓴다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으니. 그렇게 연구를 하고, 글을 쓰고, 정리하고 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글로 밥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작가보다는 저자에 더욱 가까운 나는, 과학과 관련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글을 쓰려고 앉는다. 먼저 한글을 실행하고 새 페이지를 만든다. 예전에 무료로 받은 공개 글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꼴인 <경기 천년 바탕체 Regular>를 찾는다. 빈 페이지의 글꼴부터 바꾸고 가만히 화면을 본다. 빈 페이지는 눈에 한껏 힘을 주고 나를 노려 본다. 빈 페이지와 눈싸움을 하다가 먼저 눈을 떼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다. “여길 채울 수 있겠어?” 종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채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눈을 내리 깔면서 소심하게 말을 삼킨다. ‘아무리 못 써도, 내가! 한 페이지는 넘길 수는 있다고.’ 여전히 빈 종이 앞에서 자신은 없지만, 일단 쓴다.


쓰고, 쓰다가 다른 생각이 나면 줄을 바꿔서 또 쓴다. 생각이 난 것을 끝까지 써 놓은 후에 여기저기 배치를 바꾼다. 눈에 걸리는 문장을 다듬고, 빼고 지운다. 후루룩 쓰고, 몇 번을 수정하고, 다시 찬찬히 읽는다. 한글 파일을 열고 닫는 시간 동안. 글의 분량이 적당히 차오를 때까지. 쓰고, 수정하고, 읽고, 또 쓴다. 그러는 동안 종이 위에는 비가 쏟아지고, 꽃눈이 맺히고, 피었던 꽃이 떨어지고 햇살도 내리쬔다. 남은 꽃은 만개한다. 바깥에서도 그리 날씨가 변덕스럽더니. 여기도 만만치 않게 소란스럽다. 봄이란, 봄에 일어나는 일이란 원래 그리도 변화무쌍한 것이다.


내 글에는 문체 대신에 날씨체가 남는다. 글을 따뜻하게 쓰고 싶은 날은 조그마한 상에 노트북을 놓고 이방 저 방 옮겨 간다. 아침에는 동쪽 방으로, 오후에는 남서쪽 방으로. 햇살이 비추는 방을 찾아가다 보면 글에 햇살이 담길 것만 같다. 차분하게 쓰고 싶은 날은 그늘진 방으로 향한다. 그런 날 쓰는 글은 약간 서늘한 느낌이 담긴다. 생기 있는 글을 쓰고 싶으면 창 너머 나무를, 책상 위의 화분을 지그시 바라본다. 나무의 생기가 글에 파릇파릇하게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초록잎을 바라본다.


나는 앞으로도 무엇이든 쓸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과학과 관련된 글이든, 에세이든. “어떻게든 나를 채워봐”라며 도도하게 노려보는 흰 종이가 내 앞에 있고, 책이 가득한 책장이 내 뒤에 있는 동안에 참으로 행복하게 글을 쓸 것이다.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 수도, 빌릴 수도 있는 이 좋은 시간 속에서. 아름다운 글을 읽고 글 그릇에 소담하게 담아내고 싶다. <작가>라는 직함을 내 이름 앞에 다는 것도 좋지만, 그저 쓰는 사람인 것도 즐겁다. 나무의 싱그러움과 꽃의 사랑스러움. 봄날의 변덕과 여름날의 쨍쨍함. 가을날의 낙엽과 겨울의 눈을 담아서 하루하루, 매일매일을 날씨처럼 쓸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나는 계절처럼 씁니다.


커버 이미지: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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