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에세이와 함께 - 10. 우리가 쓰는 말들

by 홍유

대학교 1학년, 과방(科房). 과방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뿌연 담배 연기, 그리고 오다가다 사람들이 몇 글자를 끄적이던 공용 일기장 날적이.


날적이를 기억 속에서 펴보니, 누군가 꽤나 길게 써 놓은 글이 보인다. 그 글이 스무 살이 느끼는 외로움이나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의 풋풋한 고민일 때에는 선배들이 큰 글씨로 ‘파이팅’이라던지, ‘술 사줄까?’ 등을 제법 크게 써 놓았다. 날적이에는 가끔 학년별 엠티 사진도 붙어 있었다.


누가 언제 과방에서 날적이를 만졌는지, 오다가다 목격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데, 자필로 과방 날적이에 고민을 털어놓고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적어 놓다니. 참으로 젊음은 좋은 것이다. 그 날적이는 졸업 이후 동기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근 25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얼마 전 학교에 잠시 방문했던 한 동기가 과방에서 우리의 날적이를 유물처럼 발견했다며 단톡방에 발굴 사실을 알린 것이다. 그날 이후 날적이에 대한 인증샷은커녕 그에 대한 한마디 말조차 올라오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제 발 저린 몇몇 동기들이 자신의 흑역사를 몇 개의 커피 기프티콘과 교환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이다. 거기에 나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미리 고백한다.


대학교 1학년이라는,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에서 우린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과정을 고작 몇 살 많은 선배들과 어른스럽던 동기들은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따뜻하고 건강하게 서로를 받아주고, 믿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성인이 되어 만난 세상에서 그보다 더 젊고 따스한 만남이 있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들 어렸는데 마음만은 어떤 어른 못지않았구나 싶어서 웃음이 난다.


우리들의 이야기. 그것은 세상을 딛다가 눈밭을 디뎠을 때, 꽁꽁 언 발을 녹여주었다. 지금은 누가 어떤 글에 어떤 답변을 달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그저 누군가 쓰고 누군가 응했던 그 시절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응해 주던 이름 모를 지원군이 있었더라는 따뜻함을 남겼다.


말은, 혀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앗아갔다. 어느 날, 한 포털의 연예 게시판은 댓글 기능을 차단해 버렸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단지 대중 앞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화살에 맞아 스러졌다. 짐짓 모른 척, 누가 쓴 글인지, 누가 한 말인지 서로 알면서도 보듬어 주던 따스함은 서로를 빤히 아는 작은 집단의 추억일 뿐, 마음껏 쏘아대는 혀들은 익명에 기대어 더 이상 너그럽지 않다. 무에 그리 잘못한 일들이 많다고 그렇게 각박한 것일까. 우리는 그런 일방적인 퍼부음과 잔인한 비난을 소통과 관심이라 쓰는 사회에서 산다.


새삼 날적이를 찾아보고 싶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줄. 나의 흑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참으로 무섭지만, 그 흑역사를 감내하면서까지 찾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쓴 사람과 받은 사람이 모두 순수한 어른이었던 그 시절의 향기. 그 안에는 우리의 젊음이 묻어 있고, 서로를 타박하면서도 걱정하던 토닥임이 스며 있고, 서로를 위해 주던 건강하고 아름다운, 주고받는 이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몇 잔의 커피를 준비해야 할까. 가져올 친구를 위해 한 잔, 나를 위해 한 잔,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시간에 같이 올,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여러 잔. 그렇게 머릿속으로 가늠해 본다. 그렇게, 날적이 속 가득 박제되어 세상에 남아 있는 따스함 속으로 여행할 준비를 시작한다.



커버 이미지 출처: FreePik

매거진의 이전글티 블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