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와 함께 - 12. 길 위에서
여름휴가차 울산에 갔다. 좋은 해수욕장이라고 해서 찾아간 곳에서 접촉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차량 손상도 미미했다. 다만 내 마음만 많이 불편했다. 뒷 차량이 포르셰라는 점에서. 뒷 차량의 연락처를 찾기 위해 고심을 하다가 차주분과 연락이 닿았다. 휴가 오셨는데 이렇게 사고를 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보험 처리를 약속한 후에 마무리가 되었다.
다음날. 집까지 오는 길에 카센터를 보면 신속하게 수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쪽 라이트의 커버가 깨진 것을 임시로 박스 테이프로 커버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라이트가 잘 작동하는지, 뒤에서 식별이 가능한지 확인한 후에 살살 출발을 했다. 여차하면, 중간에 하루 더 어딘가에서 묵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을 먹고, 고속도로 대신 최대한 시내 도로와 국도를 타기로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로 표지판에서 "제2 석굴암"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서행의 힘이다. 이런 표지판을 발견하다니 행운이다. 어차피 멀리 돌아가는 길이니까 가는 길에 저곳에 들렀다 가보자며 방향을 틀었다. 휴가 첫날 경주에 가서 석굴암을 보고 왔는데, 이건 또 어떻게 다른 석굴암이려나 궁금했다. 석굴암이 또 있다니. 신기하다. 비록 바로 앞에서는 볼 수가 없지만, 멀리에서 석불 세 분이 계신 것은 보였다. 휴대전화를 들어, 최대한 높은 배율로 화면을 당겨서 보니 제법 선명하게 잘 보였다.
*제2 석굴암. 정식 명칭은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 석굴”. 군위 삼존 석불이라고도 부른다. 7세기 중엽~말엽 경에 군위 지역의 신라인들이 천연 절벽의 거대한 자연 암벽에 생성된 자연 동굴을 뚫어 조성한 석굴사원으로, 경주시 토함산에 신라인들이 조성한 석굴암의 모태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불상들은 오랫동안 존재가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1962년에 처음 발견되었고, 이후 학계의 연구 조사 결과 석굴암보다 100여 년 이상 일찍 조성되었다고 밝혀졌다. 흔히 제2 석굴암이라고 부른다. 항마촉지인을 한 본존불인 아미타불이 중심에,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왼쪽에는 대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국보 제109호이다. -나무위키-
대구까지 갔으니, 근처에 있는 서원을 찾았다. 왠지 근처에 서원이 많을 것도 같고, 문득 서원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둘러 오는 길이라 생각하니 새삼 여유가 생겼다. 근처에 가장 가까운 서원으로 “임고 서원”이 잡혔다.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서원이라고 했다. 서원의 앞마당에는 개성의 선죽교가 재현되어 있었다. 선죽교 옆에 단심가도 적혀 있었다. 서원을 들렀다가 커피 한 잔을 사서 돌아오는 길. 천천히 돌아오는 국도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삶이라는 여행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마도 내 삶도 이렇게 흘러오지 않았을까? 계획대로 고속도로를 달렸고,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의도치 않은 사고도 당하고 수습도 하면서. 새 길을 찾아 천천히 걸어보는 삶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쾌속으로 질주하는 동안, 오직 속도에 취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빨리 졸업하고, 빨리 직장을 잡았다. 그러다 사고처럼 만난 사람들의 집요한 괴롭힘에 회사를 그만두고, 새 삶을 살아 보겠다고 다른 길을 잡아 들었다. 그간 빠르고 정신없었어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채웠던 내 시간이 마치 보험처럼 그 사고에서 나를 구원했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새로 열린 길을 쾌속으로 달리기보다는, 길 위에 있는 보물을 많이 찾으려고 서서히 걸었던 것 같다. 새 길 위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마음으로 다친 내 마음을 구해 내었다.
나는 아직 고속도로에 다시 오르지는 않았다. 필요하면 다시 오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참으로 즐겁다. 삶을 챙기며 살아가는 이 순간들이 소중하다. 주변에 챙겨야 할 보석들이 가득하기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채우고 지워가면서, 길가에 숨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간과 태도를 내 삶의 보험으로 채워 놓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지금 나는, 어차피 둘러 가는 길 위에서 조금 천천히 걸어 본다. 그것이 어쩌면 삶이라는 여행의 이유는 아닌지. 가끔씩 곰곰이 씹어 보면서.
표지 그림 출처: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