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꽂아 놓은 책갈피

에세이와 함께 14. - 책 이야기 2편

by 홍유
책갈피.

책장과 책장 사이 또는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의 낱장 사이에 끼워 두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 표준 국어 대사전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여기까지 읽었다는 표시를 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는 살짝 귀퉁이를 접기도 하고, 접착 메모지를 붙여 놓기도 한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던 책이라면,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그대로 꽂아 놓기도 한다. 그러면 책에는 흔적이 남는다. 접힌 흔적, 뭔가 끈적한 느낌이 나는 부분, 그리고 펜의 굴곡대로 구부러진 페이지. 가끔 읽던 부분을 그대로 펼쳐 바닥에 엎어 놓기도 하는데, 뭐. 이렇게 되면 책이 어떻게 되는지는 너무나도 명확한지라 다시는 하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내 책이니까. 책을 애지중지하며 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내 책을 보는 이유는 조금 더 편하게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으니 말이다. 대체적으로 내 손을 거친 책은 많은 밑줄과 메모에 얼룩덜룩해지기 때문에, 어차피 읽고 나면 버려질 책이라 생각하면서 편하게 보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까지였을까. 아마도 도서관 책에 많이 의존하기 전까지는 그리하지 않았을까.


도서관 책을 빌려 오니, 굉장히 조심스럽다. 공공의 물건이라는, 그리고 잠시 내가 맡은 물품이라는 말은 반드시 처음 상태와 가장 비슷하게 반납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같이 가져 온다. 한 페이지를 슬쩍 들어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도서관 책의 귀퉁이를 접을 수가 없다. 펜을 끼워 놓는다니. 언감생심 말도 안 된다. 접착 메모지는 뗄 수가 있어서 좋지만 언제나 휴대하고 다니자니 자꾸 잊게 된다. 주로 책갈피로 사용하던 것들에 전면 사용 제한이 걸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처음에는 정식 책갈피를 구입했다. 인터넷 서점에서 10개에 얼마 하는 것을 책과 함께 배송료 무료로 받았는데, 이럴 수가. 10개 중 딱 하나를 사용하자마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보였다. 아는가. 조금 단단한 책갈피를 꽂아 놓으면 그 페이지만 위로 꼿꼿하게 서 버린다. 이러면 의도치 않게 책이 구겨지는데, 이래서야 도서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구매한 책갈피는 다시 내가 소유한 책 중, 다시 읽거나 아직 못 읽은 책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앞에 놓고 책을 뒤적이다가 맞춤인 듯한 것을 찾았다. 카페에서 주는 냅킨. 냅킨을 쫙 펴서 책에 들어갈 크기로 접으면 적당히 얇고 부드러운 책갈피가 생긴다. 책장에 무리를 주지도 않고, 책이 벌어지지도 않으며, 책에 흔적이 남지도 않는다. 그리고 책을 다 읽으면 냅킨 본연의 자세로 돌려서 무언가를 닦아 내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아주 좋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 생긴 빨대 껍질도 보인다. 빨대를 싸고 있던 비닐이나 종이 포장을 책갈피로 쓰면 아주 좋다. 적당힌 길이를 확보한다면 거의 가름끈처럼 쓸 수 있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버리면 깔끔하다. 어차피 버릴 물건이었으니, 이것도 아주 좋다. 나름 새활용을 한다는 자부심도 살짝 든다.


빵을 샀다가 따라온 빵끈도 쓸만한다. 빵끈은 여러 번 재활용도 가능하고, 다른 물건을 급하게 봉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길에서 받은 전단지, 미처 버리지 못한 영수증, 가끔은 작은 고무밴드 형태인 머리끈까지.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은 책갈피가 존재했다. 수많은 예비 책갈피들 앞에서 언제든지 읽던 책을 멈추고 덮을 자유가 생겼다.


반드시 여기까지 읽어야 한다는 한계가 없어지니, 이제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책과 앉을 곳만 있으면 되었다. 잠시 멈추는 지점이 오면, 나는 오늘 여기까지 걸었다는 흔적을 주변 사물과 함께 끼워 놓는다. 때로는 그 주변 사물이 참으로 흔한 것이더라도 그 순간 내 곁에 있어 주었던 것이라 소중하다. 그 물건이 언젠가 이 책을 떠나게 되더라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테니 서운하지 않을 테다. 잠시 내가 멈추었던 그 자리는 도서관으로 돌아 갈 책과 원래 자리로 돌아간 물건과 함께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림처럼 기억될 것이다.


적당한 빛이 있었고, 읽기 좋은 책이 잇었고, 멈춤을 책갈피에 기록해 놓을 소소한 책갈피들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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