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좋아하는 장면 위주로 연출을 분석하며 화면 구성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중점으로 서술하려 한다.
1. 장례식장면
일반 사람들의 모습은 역광으로 까맣게 묘사하면서 정작 죽음을 앞둔 정원의 모습은 똑바로 보여주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정원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도 저렇게 슬퍼하지 않을까하는 정원의 참담한 심정이 표정에서 드러난다. 이 장면을 다르게 보면 정원의 영혼만이 장례식에서 맴도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대비, 그것에서 느끼는 정원의 소외감을 아이러니하게 표현해낸다.
2. 다림의 첫 등장과 마지막
다림이 처음 등장할 때 사진관의 창문에 비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관에는 두 소녀의 사진(화면 오른쪽 하단)이 걸려있는데, 그 중 한명이 정원의 짝사랑 지원이다. 사진이 걸려있다는 말은 정원이 아직 지원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영화 중반, 아직 너를 기다리느라 결혼을 안했다는 정원의 진담섞인 농담이 이를 드러낸다. 사진은 지원의 요청에 의해 내려간다. 결국 지원도 옛사랑이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게된 것이다. 다림은 이 사진을 찌뿌둥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라 그렇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질투에 찬 표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는 지원의 사진이 다림의 사진으로 대체된다는 암시를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원의 사진이 있던 곳에 다림의 사진이 걸려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정원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즉, 정원이 다림의 사진을 진열하고 갔다는 것은 다림에 대한 정원의 사랑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다림의 첫 등장과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원의 사랑이 지원에서 다림으로 옮겨갔고, 다림은 추억의 저편에 묻히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될 사랑임을 알려준다. 다림 또한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비록 정원이 말없이 모질게 떠났지만,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정원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지원과 다림의 차이
정원의 사랑에서 지원과 다림의 차이는 추억으로 그치느냐, 사랑으로 간직되느냐이다. 지원은 전자, 다림은 후자에 해당하는데 감독은 이를 화면 구성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보여준다.
정원 뒤의 화면은 깊은 심도를 보여주며 마치 둘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정원과 지원의 뒤를 과거, 앞을 현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유의미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원은 어색한 몇마디를 나눈채 앞(미래)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원은 그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시한부 인생인 그에게 지원과의 미래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앞선 리뷰에서 말했듯, 정원은 현재 주차된 차처럼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정원과 다림이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은 다르다. 먼저, 카메라를 비스듬히 놓아 화면의 심도가 얕고 인물의 움직임이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이에 움직이는 정원과 다림은 나아간다는 느낌을 준다. 카메라는 다림을 팔로우하다가 정원과 다림이 같이 이동하는 순간에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게 가져간다. 그리고 이 둘이 스쿠터에 타고 달리는 순간 빠르게 패닝한다. 이때 화면의 왼쪽을 과거, 오른쪽을 미래라고 말한다면 이들의 사랑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된다. 숙녀가 무거운 것을 들어야겠냐는 다림의 적극적인 도발에 둘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또 다른 재미가 있는데, 이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먼저, 다림은 낑낑대며 무더운 여름에 짐을 들고 걷는데, 다림은 초원 사진관 옆을 걷고 있다. 이는 다림이 일부러 정원을 마주치기 위하여 이 길로 걸은 것일 수도 있다는 귀여운 상상을 하게 한다. 또한 다림은 정원의 스쿠터가 자신을 그냥 지나치자 이내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데, 정원의 스쿠터가 다시 돌아오자 다시 표정이 밝아진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소리가 커지는 것을 느끼면서 표정이 밝게 변하는 디테일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영화의 후반부에도 나온다. 마지막 데이트 장면에서 둘은 밤에 골목길을 걷는다. 카메라의 구도나 움직임이 위의 장면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빠르지 않다. 천천히 걷고 있는 둘을 따라가면서 팔짱을 끼는 것만으로도 설렘이 느껴지는 느린 사랑의 모습을 카메라는 캐치하여 보여준다. 여기서도 둘은 화면의 오른쪽으로 향하지만 이후 둘은 데이트를 하지 못한다. 배경도 캄캄한 밤이라 어두운 느낌을 주고 어찌보면 사랑이 끝난 것 아닌가 싶지만, 앞서 말했듯 정원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유효하다. 어두운 죽음 같은 밤을 걷지만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하며 떠나는 것이다. 어쩌면 이래서 귀신 이야기를 했을 수도...
4. 가족들의 디테일한 연기
디테일한 연기는 다른 연기자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특히 가족인 정원의 아버지와 동생에게서 볼 수 있다.
둘은 수박을 먹으면서 옛날 얘기를 추억한다. 즐거운 분위기이지만 동생은 이내 참담한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본다. 정원과의 즐거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슬픔이 표현되었다. 대사로 표현되지 않아 알아채기 힘들 수 있지만, 오히려 절제된 연출로 인해 슬픔은 배가 된다.
정원이 죽음의 두려움에 슬피 우는 장면에서 아버지는 정원에게 다가가려다가 이내 멈춘다. 이때 그림자로 표현된 아버지의 손연기가 예술이다. 문을 열고 다가가 위로를 건네고 싶지만 차마 못다가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디테일한 손연기로 표현한다.
5. 수산시장장면
아마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아닐까... 그저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주제인 죽음과 그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 장면안에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를 보여주고, 그 다음 손질되는 물고기의 모습이 보여진다.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는 사실상 시한부나 다름 없다.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질되는 물고기는 정원의 죽음을 상징한다. 손질되는 물고기를 정원의 아버지가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 정원의 아버지는 살짝 눈을 찡그리는데, 죽음에 대한 잔인함과 고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뒤를 돌아 정원을 쳐다본다. 죽음이라는 공통점이 정원과 물고기 사이에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은 무너졌으리라. 정원은 수족관 속의 물고기를 쳐다본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느껴졌을 것이지만, 오히려 담담하게 그들을 본다. 이는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초연하게 바라보려는 정원의 태도가 담겨있다. 필자는 어릴적 횟집 앞을 종종 지나며 물고기들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게 아닌가하면서 측은지심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이것이 영화로 표현된 것을 보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연출분석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