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퇴직한 문과생 이야기

13. 불편하다! 불편해!

by 드리머

문과 출신인 인문이는 가뜩이나 IMF이후 좁아진 취업의 문을 활짝 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당시 고용한파와 맞물려 국가에서 야심 차게 도입한 직업상담사 1회 자격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택한 건 다름 아닌 문제의 난이도 때문이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는 보통 첫회 자격시험은 평이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난도가 낮은 수준으로 출제되는 경향이 있으니 첫회에 합격을 노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수험생들에게 공공연하게 홍보 아닌 홍보를 했던 것이다.

문과대 출신인 인문이는 기술자격증에 도전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공인중개사 정도까지만 검토해 봤을 뿐 자격증 선택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공무원 시험 준비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가장 만만한 자격증이라고 생각하고 노량진 학원가에 선뜻 몸을 던졌던 것이다.

다행히 1차, 2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고 나서 당시 경인지방노동청에서 일할 기회까지 얻었지만 급여 등 복리후생에 만족하지 못한 인문이는 그 뒤로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던 와중에 진급이 조금씩 늦어지고 성과에 대한 보상도 그렇게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다시 자격증을 취득해 다른 일을 해보려는 욕심과 기대로 탐색을 해보았지만 당최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고 공부시간 역시 지속가능하지 않아 일찌감치 포기를 해왔던 것이다.

결국 지름길로 택한 것이 기존에 따놓은 직업상담사 자격증으로 다시 그쪽 분야에도 발을 담가볼까 하는 심산으로 직무교육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교육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이쪽 분야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직무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이 주를 이루었고 시간대도 평일 업무 시간 중에 수강할 수 있는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현장 경험 없이 자격증만을 가지고 왕초보가 수강할 수 있는 교육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한 달 정도 계속 탐색을 이어가던 중 다행히 거주지 인근 지역에 위치한 교육기관에서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교육이 진행되는 것을 발견하고 인문이는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신청했다. 혹시라도 선착순 컷에 걸려 이마저도 못 듣게 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총 20명을 모집하는 그 교육에 간신히 탑승하게 된 인문이는 초창기 경인지방노동청에서의 기억은 뒷전으로 한 채 부푼 기대감이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참석하게 된 주말교육에 행여나 늦을세라 아침부터 교육장소로 향하는 인문이는 한껏 들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회사생활에 직업상담사 분야의 일이 일상의 활력소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희망과 기대는 품고 있었던 시간에 비해 너무 빨리 사그라든 게 문제였다.

교육장소에 도착한 인문이는 입구에 마련된 테이블에 슬금슬금 다가가 방명록을 작성하면서 다른 참석자들 이름을 스캔했다. 이름만 보고 모든 걸 판단할 수 없겠지만, 대략 봐도 인문이만 남자인 것으로 보였다. 잠시 그 자리를 떠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주말에 이왕지사 여기까지 왔는데 발걸음을 되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아 무거운 몸을 강의실 안으로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총 5개의 원형 테이블에 각각 5개의 의자가 세팅되어 있었고 각 자리마다 명패가 놓여 있어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뒷자리를 선호해 오던 인문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앉고 싶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초 예정되었던 교육시간이 다가오자 강의실의 빈자리가 한 두 자리씩 채워졌다. 역시 인문이가 방명록을 스캔한 바와 같이 인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여성이었다. 강사는 남자가 아닐까 하는 기대마저도 강의실 문이 열리는 순간 여지없이 사라졌다. 강의실 내 대략 20명 남짓한 인원 중 남자는 인문이 단 한 명, 나머지 모두 여성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남자가 주목받기 마련이다. 인문이가 가장 싫어하는 완벽한 상황이 마련되었다. 어디서든 튀지 않고 조용조용 존재 감 없이 머물다 사라지는 인문이는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여지없이 펼쳐졌다.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 여기는 왜 왔는지 등에 대한 자기소개도 인문이부터 시작했다. 각자의 소개가 끝난 후 각 테이블마다 조이름을 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무언가를 협업해서 결과물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비호감이었던 인문이는 결국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조장으로 간택되기까지 했다.

당초 인문이가 생각하고 온 교육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수업진행으로 조금씩 후회가 밀려드는 인문이는 일단 일요일인 내일 수업은 참석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오늘 수업은 언제까지 버틸까를 궁리했다. 여기 더 앉아있다가는 정말이지 영영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쳐다보지도 아니 내다 버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조장선출, 조 이름 선정, 자기소개 등의 과정이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인문이를 제외한 다른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듯 보였다.

홀로 무인도에 남겨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인문이는 군중심리가 발동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애써 태연모드로 전환했다.


약 10여분 정도 흘렀을까?

강사가 유인물을 한 묶음 들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조마다 나누어준 유인물에는 대화 형식의 글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앞장에는 본인이 상담자 역할을 뒷장에는 내담자 역할을 할 것을 상상하고 구직상담과 관련된 가상의 시나리오를 적어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시간은 15분이라는 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글을 써 내려가는 소리가 강의실을 메웠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인문이는 바로 전 휴식시간에 방탈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감옥같이 느껴지는 이곳을 벗어나고도 싶었지만 휴대한 가방이 인문이의 발목을 잡았다. 가상의 시나리오는 어찌어찌 적겠는데 강사의 다음 지시가 조금씩 상상이 된 인문이는 설마?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여지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불만으로 점철되었다.

약 20여 분간의 가상 시나리오 작성이 끝나고 강사의 입에서 나온 지시사항을 듣자마자 인문이는 그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다.

“ 자 이제는 마주 보고 앉은 2명씩 짝을 지어서 한 명은 상담자 다른 한 명은 내담자 역할을 부여하고 각자 적은 시나리오대로 번갈아가면서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시나리오대로 대화를 나누면서 구직상담을 해보라니…..

그야말로 인문이가 극도로 싫어하는 참여형 실습 강의의 덫에 제대로 걸리고 만 것이다.

인문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는 걸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 헛기침을 연신 해대며 애써 감정을 삭였다.

하지만 강사는 이런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인문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조금씩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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