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젠 괜찮아?
“자~ 여러분, 오늘의 청일점과 그의 파트너가 가상의 시나리오대로 구직상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강사가 인문이의 옆에 다가와 믿기지 않는 멘트를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망언 중에 망언이었다. 아무리 좋게 표현하려고 해도 이럴 때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는 이 말 밖에 생각나지 않은 인문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을 고르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함께 강의실 맨 앞으로 자리를 옮긴 인문이는 서로의 시나리오를 한 번씩 역할을 바꿔가며 간단한 구직상담 시연을 끝냈다.
매도 먼저 맞으라고 했던가? 한두 팀만 시연하고 끝날 줄 알았지만 재미가 들린 듯한 강사는 참석자 모두를 시연하게 했다. 다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른 팀들의 시연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던 인문이는 어떻게 하면 스무쓰 하게 이 강의실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리만 하는 눈치였다.
모든 팀의 시연이 끝나자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강사는 또다시 새로운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인문이의 방탈출 시간은 점점 지연되었다. 이번 유인물에서는 내담자와의 라포형성을 위한 멘트를 작성해 보는 것이 과제였다. 날씨, 식사, 여기까지 온 경로 등 주로 일상과 관계가 있는 가벼운 질문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면 될 것 같은 느낌에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던 인문이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 들렸다.
“자~ 여기까지 마치고 잠시 쉴게요~”
막상 기다리던 멘트를 듣고 나니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만약 교육 도중 강의실을 이탈한다면 그 빈자리가 너무 클 것 같은 느낌에 인문이는 망설여진 것이다. 그냥 강사한테 급한 용무가 생겼다고 말을 하고 갈지, 아님 이대로 빈틈을 노려 도망을 갈지 어느 방법이 나을지 딱히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언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땐 걸으면서 생각하라고 했던가?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오전만 버텨보자!’
기대하지 않았던 내면의 소리에 인문이마저도 놀라고 말았다. 그 오전이라고 해봐야 1시간 정도 남았으니 한 타임만 더 들으면 점심시간이고 그때는 다시 생각이 정리가 되어 지금보다는 결정이 쉬우리라는 예상으로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인문이가 착석하자마자 마지막 오전 수업이 시작되었다. 몇몇의 수강생들을 호명하여 작성한 내용을 읽어보라고 한 뒤 이론 수업을 이어가는 강사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쉰 인문이는 이 시간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탈출을 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드디어 다가온 점심 식사시간, 정오를 5분 남겨두고 식사를 맛있게 하라는 강사의 인사말로 드디어 오전 수업을 마치게 되었다. 어차피 혼자 밥을 먹기도 불편하고 1시간이라는 시간을 강의실에서만 앉아있으려니 뭔가 어색할 것 같아 인문이는 예정대로 자리를 정리하고 당당히 나섰다.
직업상담사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인문이의 두 번째 시도도 그렇게 허무하게 스치듯 지나갔다.
4년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아닐진대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러 다시 인문이를 유혹하는 직업상담사라는 세계는 우회적으로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수도권소재 모대학 자유전공학부에서 신입생들의 전공선택과 관련된 컨설턴트 업무를 보게 된 인문이는 주말을 이용해 직무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을 또다시 탐색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과 달라진 건 여기저기를 뒤져가며 이 잡듯이 서치를 해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정부에서 위탁을 받은 모대학에서 각 지역마다 거점을 두고 평일과 주말에 전방위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인기 있는 몇몇 강의를 제외하고는 수월하게 신청을 할 수 있어 마음 졸이지 않고 여유 있게 신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사이 관련분야 교육이 이렇게 체계적이고 다양하게 변한 것을 보면 그것도 국가 차원의 예산이 투입될 정도면 그간 고용과 관련된 수요나 공급, 이슈가 증가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한 인문이는 처음 입문하는 왕초보가 듣기에 적합한 강의를 선택해 거의 매주 주말에 동대문에 있는 교육장소로 출근할 정도도 일정을 빡빡하게 세팅했다.
인문이가 실제로 담당하는 업무도 학생들과 상담하는 업무였으니 예전처럼 참여형 실습 위주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너무 부담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어 달 정도의 교육을 미리 신청해 놓은 인문이는 다양한 교육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첫 교육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여 남짓 소요되는 교육장으로 가는 동안 인문이는 다양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다.
직업상담사 교육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때가 벌써 10년이 넘어도 한참 넘었는데 그간의 세월 동안 이 분야 교육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연령대와 남녀 구성비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제일 컸다.
다만 인문이는 세월이 변했어도 왠지 오늘도 자신이 청일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조금 일찍 교육장소에 도착했다.
교육담당자로 보이는 사람이 교육준비에 한창이었다. 역시나 테이블 배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T자형 테이블 배치로 이건 누가 봐도 참여실습형 교육임에 분명했다. 꽤 지난 과거지만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까? 인문이는 예전처럼 두렵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교육준비를 하고 있는 담당자에게 괜스레 방해가 될까 싶어 다시 나가려는 순간, 눈치를 챘는지 그냥 계셔도 된다고 하여 맨 뒷자리를 우선 점령했다. 다행히 지정석은 아니었던 것이다.
“교육 오시는 분들의 연령대는 대략 어떻게 되나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인문이가 담당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교육마다 수강생 분들 연령대가 천차만별이어서 가늠하기가 힘든데 거의 전 연령대가 다 모인다고 생각하시면 맞을 것 같습니다.”
전 연령대라…. 뜻밖의 대답이었다. 최소한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이려니 생각하고 던진 질문인데 전 연령대라고 하니 의외였던 것이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수강생으로 짐작되는 한 명의 여성이 입장했다. 바로 뒤이어 입장하는 수강생은 남자였다. 그 두 사람은 언뜻 보아도 인문이보다는 젊어 보였다. 일단 청일점의 꿈은 사라졌고, 오히려 강의실 내에서 최고령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휩싸였다. 책상 위에 올려진 교재를 뒤적거리는 와중에 또 한 명의 남성이 입장했다. 인문이가 최고령자의 영예를 내주는 순간이었다. 인문이보다는 적어도 5살 이상은 많아 보이는 듯한 남성의 등장으로 인문이는 청일점도 최고령자도 아닌 그저 보통의 평범한 수강생 중 하나로 인식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교육 시작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약 30여 명의 수강생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수강생들의 일인일색을 열심히 스캔하고 있는 인문이는 자신의 위치가 적어도 중간쯤은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인문이보다 젊은 사람 반, 연장자가 반 정도의 비율이었고, 특이한 것은 남녀구 성비가 거의 반반이었다는 것이 인문이를 더욱 놀라게 했다.
드디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정부 위탁사업으로 진행되는 교육커리큘럼과 금일 8시간 동안 교육을 담당할 교수님을 소개하는 담당자의 안내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직업상담사 직무향상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10여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강의실 안에서 인문이는 예전과 달리 편안함을 느끼며 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처럼 수험생으로 되돌아간 향수를 느끼며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