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피할 수 없으니 즐겨봐!
“여기 계신 분들은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이 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곧 언제 어디서든 상담을 한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평소 업무 보실 때처럼 편안하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얘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서 우리 강의실 분위기를 좀 더 애매모호하게 바꾸어 보아요~~”
오늘 8시간의 교육을 담당할 강사의 첫 멘트였다. 인문이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뭐 특별할 것도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으레 치러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는 일 자체가 매시간 사람을 대하는 업을 하는 사람들이고 더구나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다 보니 이런 건 뭐 누워서 떡 먹기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작은 메모지를 사람 숫자에 맞춰 각 테이블에 나눠주더니 이름이든, 직업이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채우라는 강사의 요청에 이름과 거주지를 일단 기입하고 나머지는 입으로 둘러대려는 인문이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메모지의 여백을 무시하고 뭔가를 빽빽이 써 내려가는 눈치였다.
잠시 후 강사의 오더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수강생들 앞에 자기 이름이 적힌 A4 용지를 시계방향으로 전달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얼굴의 요소를 하나씩 그려나가는 것이었다. 한 바퀴를 돌고 온 인문이의 얼굴은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안경 쓴 괴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잠시 후 이어지는 자기소개 시간에는 이름, 직업, 거주지, 교육에 참가하게 된 동기를 밝혀가면서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였다. 젊었을 때 접했던 이 분야의 교육과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고 느낀 인문이는, 다만 교육에 참여하는 자세나 태도가 바뀌었다고 할까? 같은 질문과 방식으로 진행되는 참여형 실습교육이었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른 사람들도 어차피 인문이와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생각을 하며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상대방과 함께 짝을 이루며 하는 실습의 주제도 전혀 경험이 없었던 생애설계상담, 전직지원 상담, 각종 검사활용 방법 등 다양한 주제의 상담이었지만 그저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상상하며 스크립트를 적어나갔고 그걸 토대로 상대방과 실습을 해나가는 인문이었다.
그렇게 너 덧가지의 실습과 이론교육을 병행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호텔 지하 세미나실을 교육장소로 택한 탓인지 점심식사는 2층에서 뷔페로 진행되었다. 아주 고급 지지는 않았지만 무료교육에 이 정도의 식사 퀄리티면 주말에 식사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와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인문이는 두 개의 쟁반을 들고 널려져 있는 음식을 하나둘씩 주어 담았다.
강의실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끼리 통성명을 한지라 식사장소에서도 조끼리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누구는 중장년내일 취업센터라는 서울시 산하 기관에서 또 누구는 직업훈련학원에서 다른 누구는 아직 취업은 못했지만 얼마 전 직업상담사 1급을 취득하고 경험을 쌓고자 강의를 들으러 왔다.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직업상담사라는 자격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것도 다양한 연령대에서 말이다.
인문이는 직업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런 과정을 겪기에는 나이가 많은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지만 지금 같은 공간에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함에 있어 나이는 크게 문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나이 60에 신문기사 생활을 접고 잠시 귀농을 생각하면서 쉬다가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를 듣고 직업상담사 자격증 시험 공부하면서 자격을 취득해 취업한 사람도 있었고, 바리스타 학원에서 직업상담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직 이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나이의 적고 많음보다 중요한 건 역시 꺾이지 않는 마음인 것을 여기 있는 사람들을 통해 느낀 인문이는 앞으로 또 어떤 참여형 실습교육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다는, 꼭 헤쳐나가야 한다는,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다짐을 돼 내었다.
짧지 않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다시 오후 교육이 시작되었다. 참여형 실습교육 중심이었던 오전과 달리 오후교육은 다소 이론 중심의 교육으로 이어진다는 강사의 안내말에 무거웠던 어깨가 다소 가벼워짐을 느낀 인문이는 교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간혹 생소한 단어가 강의 흐름을 더디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후강의도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강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후 내내 공부한 생애진로설계에 관한 이론을 수강자 입장에서 작성해 보는 시간이었다.
교재 한 면을 꽉 채운 생애설계 계획서 작성이라는 제목의 워크시트를 강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인생사명과 생애목표를 적는 커다란 표 안에 과연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 대략 난감한 표정으로 종이만 쳐다보던 인문이는 잠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과정은 이미 예전에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전부터 어떤 변화의 시점마다 최소 한 두 번쯤은 적어봐야 할 내용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나이 오십에 적으려니 인생의 방향성 없이 그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속도에만 열중한 삶을 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전에 당장 인생사명과 생애목표를 정하는 게 급선무였던 인문이는 또다시 생각에 잠기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요동치는 인생 사명과 생애목표라는 울림을 느낄 수가 없었던 인문이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사명과 목표를 적자라고 다짐하며 한치의 울림도 없는 마음을 애써 정리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짧은 시간 안에 인문이는 인생사명과 생애목표를 완성했다.
ㅇ 인생사명 : 나는 지속적인 자기 계발과 성장을 통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 넘치는 지식과 자원을 타인과 함께 나누는 삶을 지향한다.
ㅇ 생애목표 : 전직, 퇴직, 창직, 창업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가 그룹으로 구성된 직업훈련기관을 설립하여 미래 인재양성에 앞장서 공동체 발전에 기여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인문이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선 강사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 인문이는 어깨를 움찔했다.
“자~ 여러분 방금 교재에 적은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선생님 이름이.,.,...”
강사가 책상을 두리번거리며 겨우 찾아낸 이름은 바로 다름 아닌 인문이었다.
“여기 임인문 선생님부터 발표를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당황할 틈도 없이 관성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작성한 인생사명과 생애목표를 낭독한 인문이의 발표가 끝나고 우리 한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그렇게 또 몇 명의 발표가 끝난 뒤 드디어 하루 8시간이라는 교육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 왔다.
교육담당자의 안내멘트가 이어졌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강사님께서 오늘 수업 참여도가 가장 높았던 분을 선정해 선물을 드리는 시간을 잠시 갖겠습니다.”
주말 배차간격이 긴 지하철을 조금이라도 빨리 타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인문이는 스마트폰에 띄운 지도앱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 모두들 너무 고생하셔서 다 드리고 싶지만 한 명을 꼭 선택하라고 하니 아쉽습니다. 그럼 아까 마지막 시간에 인생사명과 생애목표를 너무나도 멋지게 작성해 주신 임 선생님께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이름이 호명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인문이가 고개를 드니 강사가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강의실 앞으로 나가 선물을 받아 든 인문이는 연신 인사를 하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불편하기 그지없었던 직업상담 분야의 참여형 실습교육을 나이 오십에 들어서야 겨우 그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인문이는 젊었을 때 빵빵하게 들어갔던 어깨뽕을 이제야 하나둘씩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