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장학 재단에서 알게 된 가람이가 연극 공연을 한다길래 오랜만에 대학로를 갔다. 시간이 약간 늦어서 낭만에 젖을 시간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꽤나 오랜만이었다. 대학로에 오면 늘 먹던 김치 나베를 저녁으로 먹고 극장으로 향했다.
가람이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은 연기를 하지 않고 수어 통역으로 무대를 채운다고 했다. 단순히 나의 상상은 연기를 하는 배우들 뒤에 가람이가 수어 통역을 하는 모습이었다. 역시나 극장에 들어갔을 땐 무대 왼편에 통역사들을 위한 자리가 주욱 마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배역이 많은지 통역사들의 자리는 열 자리가 넘었다. 극을 기다리는 동안 관객석에서는 종종 옷깃 스치는 소리들이 났다. 농아 분들이 소통을 하는 모습이었다. 꽤 많은 분들이 손짓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곳에 알아보지 못하는 언어의 형태를 감상했다.
시간이 되고 극이 시작되자 약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대에서 몸을 풀던 배우들의 뒤에 가람이를 포함한 통역사들이 각 배역에 맞게 섰고, 이어 배우들은 벌떡 일어나 차례로 통역사의 자리라고 생각되는 자리로 향했다. 한 명 그리고 한 명. 총 열 한 명의 배우들이 자리를 채워 앉자, 무대의 주인공인 배우들이 아닌 통역사들이 되었다. 조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우가 연기를 시작했다. 말 그대로 배우는 앉아서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통역사들이었다. 두리번거리기를 몇 차례. 나를 포함한 몇 몇만 제외하고 수어를 이해하는 분들의 시선은 무대로 향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엇을 봐야 하는지 헷갈렸지만, 그럼에도 가람이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언어의 형태를 표현하는 통역사들에게 시선을 뒀다. 배우들의 연기는 귀로 들어왔지만, 통역사분들의 손짓을 알 방법은 없었다. 정말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평범할 땐 느렸고, 격정적일 땐 빨랐다. 몇 가지의 단어들은 생략 되어보였고, 또 다른 단어들은 표현에 한계가 있어보이기도 했다. 만약 이 세계에서 이 언어가 주된 언어라면 음성언어를 가진 나는 어떤 마음일까?라는 상상도 했다. 염치 없게도 소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은 늘 이런 극단적 경험이다.
극은 훌륭했고, 통역사분들의 연기도 뛰어났다. 처음으로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굉장한 경험이었다. 90분 동안 다른 세계를 상상했고, 당연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조용한 관객석과 조금 먼 무대 사이에 대답을 주고 받던 이들의 손짓이 유독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