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32분, 지이이잉...
"34분 만에 배달이 완료되었습니다."
12시 33분, 또다시
"36분 만에 배달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이들 점심이 무사히 우리 집에 도착한 소식이었다.
어제 친정엄마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이제 집엔 아이들 둘만 남겨졌다. 나는 점심으로 원하는 메뉴를 배달시켜 주겠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역시나 각자 원하는 메뉴를 요구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 아이는 연어초밥,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아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치킨이었다. 그것도 순살로 콕 집어 요구한다. 메뉴를 통일시키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어른 없는 첫 점심에 원하는 메뉴를 먹이고 싶은 마음에 아이들 요구 그대로 응해주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시켜 줄 테니 맛있게 먹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는데, 11시 50분이 넘어서야 음식주문을 하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날따라 점심 교대당번인 나는 내 점심시간이 늦은 것만 생각했지 아이들 점심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항상 친정엄마가 알아서 챙겨 먹여주시니 아이들 점심은 내가 신경 쓸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놀래서 배달어플을 켜고 부랴부랴 주문을 하고 아이들에게 몇 시쯤 도착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배 고프다고 아우성인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태연하게 점심때는 원래 배달이 늦은 법이라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초조하게 음식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던 나에게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은 그 어느 소식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음식이 도착했는지 물어보고 뚜껑 잘 열어서 먹어라고 당부를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이 다 먹어 갈 즈음에 전화를 다시 걸어, 남은 음식이 있으면 냉장고와 주방 한편에 두라고 일러두었다. 둘이 각각 메뉴를 시켜서, 제법 많은 양이 남은 것 같았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보니 주방 한편에는 치킨박스가, 냉장고에는 초밥도시락이 자리 잡고 있다. 씽크볼에 담긴 그릇을 보니 나름 앞접시도 가져다 놓고 먹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은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며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얘들아, 내일부터는 메뉴를 통일해 주면 좋겠어. 서로 의논해서 정해주길 바라."
웬일인지 아이들이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이들이 원한 메뉴는 피자였다. 요즘 아이유가 광고한다는 피자 한판에 치즈오븐스파게티를 추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번에는 주문시간 놓치지 않고 12시에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피자집 주문 가능 시간까지 알람 설정을 해놓았다. 덕분에 아이들도 나도 맘 편히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은 첫째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라 지참(허락된 지각)을 하고 오전 일찍 병원을 다녀왔고, 아이들 점심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사주었다. 이틀이나 배달 음식을 먹였는데, 이번에도 편의점 도시락이라 엄마로서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내 맘은 모른 체 아이들은 편의점 도시락에 신이 났다.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서 그릇에 옮겨 담고 전자레인지에 따뜻하게 데워 밥숟가락 뜨는 걸 보고 회사로 출근하였다. 아이들 점심시간 끝까지 챙기고, 나도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도 되었지만 1시간이라도 빨리 회사로 복귀하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할 거 같아 서둘러 출근을 하였다. 그리고 출근을 하였더니 해야 할 일들이 좀 쌓여있었다. 필요한 내용을 전달하는 팀장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인다. 그럴 분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냥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인지 왠지 모르게 또 눈치가 보이는 이 상황을 언제쯤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음날이 회사를 안 가도 되는 주말이란 것이 정말 눈물겹게 반가웠다.
오랜만의 워킹맘 생활에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나의 첫 위기.
친정엄마는 며칠 더 입원을 하여 검사결과와 경과를 지켜보셔야 하고, 아이들은 곧 개학을 앞두고 있다. 개학을 하면 오히려 점심은 학교에서 해결하고, 빈 시간들은 학원을 다닐 테니 챙길 게 더 줄어들 거 같다. 친정엄마의 부재로 나는 이리저리 발을 동동 거리는데 너무나 태연하고 무심한 남편에게 화가 났다. 한시름 놓고 나니 이제 나의 화살이 남편에게 향하나 보다. 타 지역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이유로 요즘 집안일과 육아를 매우 등한시하는 그분은 요즘 진짜 밉상 중에 상밉상이다.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내고, 비수처럼 꽂아버리고 싶은데 아이들 앞이라 꾹 참는다. 말 안 하면 모르는 저 곰 같은 인간을 어떻게 하면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진짜 내 인생 최대의 난제이다. 친정엄마의 부재, 워킹맘 생활의 위기는 결국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귀결된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성장한 아이들이 고마웠다가도, 남편의 무심함만 생각하면 또 열불이 나는 한 주였다. 나도 아이들도 이렇게 또 한 뼘 자란 것일 테지... 그런데 우리 남편은 도대체 언제쯤 더 자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