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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Aug 02. 2023

욕망의 저장소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 대하여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는 대단히 철학적이다.', 'OOO의 철학을 표현했다.', "대략 어떤 철학자가 내뱉은 명언". 나에게 있어 가장 김새게 만드는 영화 코멘트 종류 중 하나이다. 그저 영화가 이해가 안 가서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궁금증의 해소는커녕 아예 알지도 못하는 철학 얘기만 잔뜩 하고 있다. 심지어 대부분은 그 철학이 정확히 어떤 철학이고 이 영화와 어떻게 연계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자연히 '뭐 철학을 모르면 감상을 할 수 없는 영환가?'라는 저항심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소위 철학하는 영화 중에는 간혹 이런 나의 저항심을 무너뜨리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전 글에서 다룬 <솔라리스>의 경우 '다들 위대하다고 하니 얼마나 위대한지 나도 좀 알자'라는 비뚤어진 마음가짐이었다면, 오늘 쓸 <존 말코비치 되기>는 순수하게 진짜 너무너무 궁금해서 들여다보기 시작한 영화이다.



인형사인 크레이그는 자신의 재능만큼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는 애완동물 가게에 나가는 아내 라티의 조언대로 일을 구한다. 그가 구한 일은 손이 빠른 그에게 적합한 서류 정리,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7층과 8층의 사이에 자리 잡은 7 1/2층의 레스터 사에서 일하던 그는 맥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느 날, 보관함 뒤로 빠진 서류를 찾던 그는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가 되는 통로의 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언뜻 봐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진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아와 타자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직접 '철학적'이니 '형이상학적'이니 하는 단어들을 내뱉는 시점에서 영화는 필연적으로 철학이라는 단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덕분에 영화를 검색하면 다양한 철학자의 이름과 이론을 영화에 대한 평론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과 송과선, 니체의 위버멘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등. 나 역시 이 글에서 어떤 철학을 빌려와 쓰려고 한다. 다만, 철학의 ㅊ자도 모르는 내가 영화 후기 전체를 여러 철학으로 채우는 오만은 지난 <솔라리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저지르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영화와 연계하여 비평한 훌륭한 글들이 이미 너무 많다. 따라서 이번 글에는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해서만 잠깐 언급하고 마지막에 나의 뇌피셜을 섞어 보려고 한다.


프로이트의 인간 정신 영역의 지정학적 구조
의식: 우리가 느끼고 깨닫는 모든 행위와 감정들을 포괄
전의식: 무의식과 의식을 연결해 주는 교량
무의식: 본능적인 욕구를 비롯해 다양한 감정과 충돌들이 억압되어 있는 곳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 영역의 지정학적 구조를 위와 같이 구성했다. 그리고 인간의 행동이나 정신적 과정이 무의식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개념은 현시대의 보편적인 이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전의식은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전의식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다양한 욕구, 감정, 충돌들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려 할 때 이를 검열하는 역할을 한다. 즉, 전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일종의 중재자임과 동시에 검열관 역할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 말코비치 되기>는 특이하게도 이 전의식을 영화 전면에 내세운다.



크레이그가 취직한 레스터 사는 머틴 플레머 건물의 7과 1/2층에 위치한다. 7층도 8층도 아닌 이 애매한 층위는 앞서 말했던 전의식과 그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유사하다. 만약 이 건물을 프로이트가 주장한 인간의 정신 영역에 대입한다면 7층 혹은 7층 이하는 무의식, 7과 1/2층에 있는 레스터 사는 전의식, 8층 혹은 8층 이상은 의식 영역이 될 것이다.


대입을 이어가 보자. 7층 이하에서 8층 이상으로 올라가려는 것은 무의식에 억압된 욕구이다. 전의식의 역할을 수행하는 레스터 사는 이 욕구를 검열하여 8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검열관은 누구인가? 의자에 앉아 벽을 마주한 채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에서 떠오르려는 억압된 욕구들은 누구인가? 플로리스를 제외한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영화의 등장인물들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라캉의 이론을 빌려야 한다.


자크 라캉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정신분석학자, 철학자이다. 그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해석한 부분 중 하나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향하는 방식에 대한 시각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세계를 물리학/생물학에 기초하여 분석하였으며, 무의식의 충동을 자아가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캉은 무의식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는 방식에 '언어학적 법칙'이 있으며, 자아란 무의식의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문화적 상징 기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언제나 상징체계를 거쳐서만 자기를 표현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는 나는 '한국인', '남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직장인' 등의 언어적 상징체계로 표현되며, 자아의 원초적 반응은 이러한 언어적 상징체계에 의해 억압된다. 그리고 여기서 무의식이 언어적 상징과 함께 구성된다. 즉, 무의식은 언어처럼 짜여 있으며, 무의식적 욕망은 기호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라캉의 이러한 이론은 레스터 사에서 '언어'적으로 표현된다. 플로리스와 말이 통하지 않는 크레이그, 스스로가 언어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레스터 박사, 머틴 플레머 건물의 역사를 비웃는 크레이그와 맥신. 크레이그, 맥신, 레스터 박사는 플로리스를 비롯한 레스터 사 직원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같은 언어 체계를 쓰는 것 같지만 말이 미끄러지고 알파벳이 뒤바뀐 듯하다. 이를 정신분석학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적 기호로 이루어져 있는 무의식적 욕망이 전의식의 검열관에 의해 의식으로부터 검열되는 것이다.



따라서 레스터 사와 머틴 플레머 빌딩은 영화적으로 재현된 인간의 정신 영역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부분이 있다. 영화는 단순히 프로이트의 구조적 재현, 라캉의 언어적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레스터 사, 전의식 영역에 난데없이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제 무의식적 욕망은 더 이상 검열당할 필요가 없다.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전의식에 새로운 탈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크레이그, 맥신, 라티, 레스터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 그러니까 무의식적 욕망들은 8층 위로 가려다 실패하고 7층 밑으로 다시 내려가는 좌절을 반복하는 대신, 7과 1/2층에 있는 새로운 탈출구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구멍은 단순한 탈출구가 아니다. 본래 자신의 의식으로 향해야 하는 무의식은 뜬금없이 '존 말코비치'라는 타자의 무의식으로 향한다.


여기서 다시 라캉의 타자에 대한 이론이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무의식은 언어적 상징체계로 구성된다. 이때 언어는 타자가 사용 중인 언어이다. 따라서 타자가 이미 사용 중인 언어의 질서에 따라 무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욕망 역시 결국 타자의 언어이므로 나의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 된다. 타자의 욕망은 나의 욕망의 원인이자 동시에 나의 욕망을 소외시키는 이중성을 가진다. 라캉은 이를 "개인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한다.



크레이그, 라티를 비롯한 무의식들은 존 말코비치라는 타자에게로 향한다. 이는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 이론의 재현이다. 또한, 이 무의식들이 가진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크레이그는 말코비치를 통해 타인이 말코비치를 알아보는 것을 즐기며 명성에 대한 욕구를 해소한다. 라티는 말코비치의 신체를 통해 남성의 육신, 남성기에 대한 욕망을, 더 나아가 맥신이라는 여성에 대한 성욕을 해소한다.


유일하게 구멍에 들어가지 않은 맥신 역시 라캉의 이론에 종속되는 무의식적 욕망이다. 그녀 또한 말코비치라는 타자를 통해 욕구를 해소하기 때문이다. 라캉의 욕망 이론을 표현하는 말 중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성관계는 없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성관계를 할 때의 상대방은 물리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 상정한 객체이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식이 가능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맥신의 성관계를 통해 정확히 묘사된다. 맥신은 말코비치의 육체와 성관계를 가지지만, 정신적으로는 라티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정신이 크레이그로 바뀌었어도 맥신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맥신의 성관계 대상은 그 물리적 대상이 아닌 맥신이 상정한 객체이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



여기까지는 영화가 라캉의 이론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철학적 분석은 사실 다른 영화 비평 글에서 훨씬 자세하게 작성되어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질문은 앞서했던 것과 비슷한 것으로 회귀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라캉 이론의 충실한 재현물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다시 영화가 전의식에 낸 구멍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구멍은 무의식적 욕망이 타자로 향하고 다시 배수로로 배출되는 구멍이다. 그런데 이 타자는 누구인가? 무의식과 연관된 타자? 욕망을 적절하게 해소할 수 있는 맞춤형 타자? 그 무엇도 아니다. 그냥 '존 말코비치'이다. 왜 존 말코비치일까? 이름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나? 도대체 존 말코비치가 누구길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내가 주목한 것은 말코비치의 직업이다. 말코비치의 직업은 '배우'이다. 정확히 어떤 작품에 출연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타자를 연기하는 배우이다. 나는 여기서 일종의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고자 한다. 배우라는 직업을 구성하는 요소에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대입하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존 말코비치'라는 존재가 수많은 무의식적 욕망의 저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이 직접 자신의 무의식을 마주했을 때 라캉의 이론에 따라 '타자의 담론으로 이루어진 자아'를 다시금 타자화하여 마침내 자아화된 타자들을 마주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이 있다. 우리가 보통 언어, 담론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말, 대화, 대사와 같이 입을 통해 발화되는 음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플로리스와 말이 통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음성이 라캉적으로 표현되는 순간이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언어가 주목을 받는다.

말코비치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배우다. 그것이 왜 공교롭냐면 지금 이 <존 말코비치 되기>는 '영화' 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 연기를 '본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매체의 중심이 되는 언어는 말이 아닌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이 지점에서 라캉 이론을 비튼다. 무의식이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는 방식에는 언어적 법칙이 있다. 그런데 의식이 아닌 존 말코비치 되기 구멍으로 배출될 때는 다른 법칙이 있다. 바로 이미지의 법칙이다.



라캉은 언어와 무의식의 관계를 설명하는 예시 중 하나로 동물을 들었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기 때문에 언어라는 상징적 기호 체계를 갖지 못한 동물에게는 무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라캉의 말을 원숭이 엘라이자를 통해 전면으로 부정한다. 영화 초반 크레이그는 엘라이자를 의식이 없는 주체로 취급한다. 하지만, 엘라이자는 의식이 없기는 커녕 무의식까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엘라이자는 라티의 손에 묶여 있는 밧줄을 보고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나쁜 감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제때 밧줄을 풀지 못해 가족이 전부 사냥꾼에게 전부 잡혀간 악몽 같은 기억에 붙어있는 정동이다. 이러한 엘라이자의 무의식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기억 회상의 이미지로 보여진다. 엘라이자는 동물이기에 언어 체계가 없지만, 동물임에도 이미지를 통해 무의식을 가진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그 이미지를 본다.


존 말코비치는 배우다. 그리고 존 말코비치는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연기를 한다. 모두의 무의식적 욕망은 존 말코비치가 된다. 배우 존 말코비치는 모두의 욕망을 수용한다. 배우는 욕망의 저장소가 된다. 영화는 이를 이미지화해서 다시 모두에게 보여준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다시 말해 영화는, 무의식적 욕망의 저장소가 되기를 꿈꾼다. 왜? 무엇 때문에?


https://filmcolossus.com/being-john-malkovich-ending-explained


위 기사에서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가인 찰리 카우프먼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결말을 해석해 보려는 시도를 한다.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카우프먼은 그 어떠한 인터뷰에서도 <존 말코비치 되기>의 핵심 메세지나 주제의식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한 인터뷰에서 작은 단서 하나를 얻을 수는 있다.

인터뷰어: "만약 이 영화가 할리우트 버전이 나온다면 등장인물들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끝날 거예요."

카우프먼: "신이시여, 저는 거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확실히 그 누구에게도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사에서는 이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추측한다. 만약 영화가 '나 자신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라티가 "내가 남자로 자아 실현 하는 것을 방해하지 마"라고 말했듯이, '실현된 자신을 찾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장면에서 라티와 맥신은 딸 에밀리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에밀리의 잠재의식에 갇힌 크레이그는 절규한다. 라티와 맥신은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지만 결국 자신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욕망은 실현되었는가? 확실하지 않다. 맥신은 라티 혹은 크레이그의 의식이 깃든 말코비치와의 성관계를 즐겼고, 더 나아가 크레이그가 조종하는 말코비치와 결혼 생활까지 즐겼다. 하지만 결국 에밀리와 함께 라티에게 돌아갔다. 라티는 남성을 꿈꿨으나 결국 남성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에밀리를 자신의 딸로 여기고 맥신과 함께 가족을 이룬다. 맥신과 라티가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존 말코비치라는 타자를 통해 자아의 욕망을 보고, 라캉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자아를 식별할 수 있는 단초를 엿본 것이다. 반면 크레이그는 끝끝내 자신을 타자의 무의식에 위탁함으로써 자신의 욕망, 다시 말해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그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더더욱 타인의 무의식으로 침잠해갈뿐이다. 따라서 그가 마지막에 반복한 "Look away"는 '끝내 타자가 된 나를 보지 말고 딴 데를 봐라' 일수도 '나의 진정한 자아를 봐줘' 일 수도 있다.


영화는 무의식적 욕망의 저장소를 꿈꾼다. 영화는 그 욕망들을 이미지로 저장하고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일차적으로는 타자화된 욕망을 경험하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자아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이것이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무의식적 욕망이 '존 말코비치 되기 구멍'을 통해 탈출하는 방식인 이미지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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