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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Oct 04. 2023

떠나고는 싶은데 좋아하는게 영화밖에 없는 사람

2023 부산국제영화제(BIFF) 0일 차

여행이나 축제에 관한 글은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있을까? 단순한 자랑부터 정보 공유, 여행 욕구 자극, 새로운 환경에서의 감정이나 영감의 공유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글부터 10월 7일까지 작성할 여행 및 영화제 후기는 단언컨대 위에서 말한 것들 중 어떠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나의 감정 배설과 혼자 있는 시간을 없애는 목적만을 가진다. 기존의 글들도 딱히 의미나 의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영화제 방문 기간 동안 쓸 글들은 그야말로 무의미하며,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댓글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글이 될 예정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지나가다가 이 글을 발견한 분이 계신다면, 부디 많은 시간을 쓰지 마시고 '와 이따위 글도 인터넷에 올라오다니! 이에 비하면내가 쓴 글들은 정말 훌륭하구나!' 정도의 자존심 채우기 용도 정도로 가볍게 활용하고 흘리시길 바랄 뿐이다.


지난 5월 회사에서 개인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다. 예상대로 이 프로젝트가 8월이 되기 전에 끝났더라면 이 우울감으로 얼룩진 글도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안타깝게도 프로젝트는 8월은커녕 9월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고, 10월이 된 지금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일을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업무 수행 능력 부족'에 대해 내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는 '더 많은 시간 투자' 밖에 없었다. 나는 7월부터 거의 매일같이 야근을 했고, 8월부터는 주말 및 공휴일에도 거의 쉬지 않고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온갖 개인적인 안 좋은 일들까지 겹치면서 육체와 정신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나보다 월등히 뛰어난 나의 선임들은 재촉은커녕 모든 질문에 친절히 답변해 주고 도와주셨다. 하지만, 이미 자존감이 바닥난 자아는 실재하지도 않는 선임들의 평가를 두려워했고, 끊임없는 자기 비하로 스스로를 저 지하 밑으로 매몰시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빌어먹을 정도로 자기 비하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회사 선임들부터 친구들 가족까지 제발 출근 좀 그만하고 어디라도 좀 다녀오라는 부탁아닌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추석 연휴마저 대부분 반납해 가면서 프로젝트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제에 가는 이 시점에도 결국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걱정해 주는 주변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혼자 여행을 가본 건 약 5년 전 대학원 입학 전에 갔던 홍콩이었다. 2박 3일 동안 <중경삼림>, <화양연화>, <무간도>, <영웅본색>, <공각기동대> 등 홍콩의 온갖 영화 촬영지만 돌아다녔었던 이상하지만 꽤나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혼자 여행을 가서 즐겨본 건 관광지도, 먹거리도, 새로운 관계도 아닌 오로지 그냥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영화와 관련된 것들 뿐이었다. 해본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그것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여행을 답습하기로 했다. 여행의 목적: 출근 안 하기, 좋아하는 것: 영화, 가까운 시일 내에 갈 수 있는 영화 관련 콘텐츠: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그렇게 해서 이번 혼자 영화제 여행이 결정되었다.



이 엉성한 엑셀 파일은 영화 예매일 전날에 급하게 작성한 예매 후보들이다. '아침, 점심, 저녁에 한 개씩, 2박 3일 동안 총 7개를 보자'라는 목표를 세운뒤, 각 시간대별로 4~5개의 영화 후보들을 선정했다. 선정 기준은 딱 두 가지 '오 시놉시스 대충 보니까 재밌어 보인다', '오 이 감독 신작이 나와?'. 오른쪽으로 갈수록 우선순위는 낮아진다. 그러니까 왼쪽 빨간 칸이 보고 싶은 영화 1순위인 것이다. 그리고 9월 22일 오후 2시, 회사에서 눈치를 봐가면서 티켓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매 결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얼핏 보면 1순위들을 꽤 많이 챙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장 먼저 시도했던 데이빗 핀처, 요르고스 란티모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신작은 깡그리 다 실패하고 말았다. 영화제 측에서 암표 거래 자제 당부를 공지로 올릴 정도로 치열한 티켓팅 속에서 회사에서 눈치 봐가며 손가락으로 카드 정보 일일이 입력하는 직장인에게 줄 자리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 전공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인간이 카드 정보 입력하다가 다 놓치고 매크로 유저들을 욕하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다.


아무튼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그래봤자 오후 9시) 대충 짐까지 싸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영화표, 기차표, 숙소, 옷가지 딱 4가지만 준비해서 짧은 여행 준비를 마쳤다. 일정 역시 영화, 밥, 잠 외에 어떠한 다른 계획도 없기 때문에 따로 짤 필요도 없다. '행사 참여도 안 해, 배우나 감독도 안 만나, 그럴 거면 영화제를 왜 가? 그냥 집에서 편하게 영화 보면 되지 않나?'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 말이 다 맞습니다'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극도의 내향인, 그것도 회사 업무로 자존감이 바닥난 내향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출근을 안 하고 영화를 보는 여행을 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앞으로 2박 3일간 잠들기 전 가장 외롭고 우울한 시간대에 그날그날의 영화제 후기를 쓰면서 시간을 때울 계획이다. 영화를 보는 것 외에 더 즐거운 일은 기대하지 않는다. 부디 나쁜 일만 일어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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