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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코선생 Apr 04. 2021

눈의 여왕

엘사가없는 겨울왕국의 원작

“조심하라! 곧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눈의 여왕 첫 구절 -  

        

동화 <눈의 여왕>은 험난한 여정에도 지적 능력을 잃지 않는 용감한 주인공, 드라마적인 선악의 대결,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들, 숨 막히는 모험, 그리고 순수하고 마음씨 착한 이들이 악인에게 승리하는 결말 등 고전적 특징을 두루 갖춘 아동문학의 위대한 탐색서사 또는 모험동화의 교과서라 칭송받는 작품입니다.     

스토리텔링의 천재 안데르센이 들려주는 오리지널 겨울왕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준비가 되었다면, 엘사와 올라프가 살기 전의 겨울왕국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사악한 트롤은 모든 물체를 추하게 보여주는 거울을 한 개 만들었습니다. 이것저것을 비춰보며 즐거워하던 트롤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비추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다 그만 거울을 깨트리고 마는데요, 거울은 수 억 개의 파편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 무렵 지상에는 카이(Kay)라는 소년과 겔다(Gerda)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ㅍㅍ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트롤의 거울파편이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혔습니다. 카이는 차갑게 변했고, 겔다는 그런 카이를 보면서 슬픔에 잠겼습니다. 어느 겨울날, 혼자 썰매를 타고있던 카이 앞에 크고 웅장한 마차가 지나갔습니다. 카이는 제 빨리 마차에 자신의 썰매를 연결했습니다. 마차에는 키가 큰 순백의 여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눈의 여왕이었습니다. 시 외곽으로 카이의 썰매를 달고 달려온 눈의 여왕은 카이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어디론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봄이 되자 겔다는 카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처음엔 카이가 죽었을 것이라며 절망하지만 태양과 꽃, 동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도중에 손녀를 가지고 싶었던 마녀의 술수로 기억을 잃기도 하고, 왕자와 공주의 도움으로 황금마차를 얻지만 산적에게 습격당해 포로가 되기도 합니다. 산적의 딸의 도움으로 순록을 얻어탑니다. 

라플란드여인을 거쳐 핀란드의 여인을 찾아간 겔다는 수순한 마음만이 카이를 구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냅니다. 그리고 곧장 눈의 여왕이 살고 있는 성으로 향했습니다. 성 앞에서 눈의 군단이 겔다를 가로막았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얼음성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눈의 여왕은 외출 중이었고, 카이는 홀로 얼음퍼즐로 '영원' 이라는 단어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겔다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카이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꼭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은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파편을 녹였고 감정을 되찾은 카이가 함께 눈물을 흘리자 눈에 박혔던 거울 조각 역시 빠져나가 예전처럼 상냥함을 되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춤추며 얼음 조각을 맞춰낸 뒤 손을 잡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둘은 겔다의 여정을 되짚으며 할머니에게로 돌아가고, 둘은 문간에 들어선 순간 서로가 어른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할머니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복음 18장 3절)"라는 구절과 함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엘사도 없고 안나도 없고 심지어 올라프도 없는 겨울왕국     

본격적인 작품해부에 들어가기 앞서 이 이야기부터 먼저 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습니다. 바로 겨울왕국의 원작이라는 말인데요.      

영화 겨울왕국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두 작품은 완전 다른 이야기며, 세계관을 공유했다고 하기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겨울왕국에는 겔다와 카이가 없고, 원작인 ‘눈의 여왕’에는 엘사와 안나 심지어 올라프도 없지요. 두 이이야기 모두 트롤이 등장하긴 하지만, 영화에는 주인공을 살려주는 고마운 조력자인 반면 원작에는 적그리스도이며, 원흉의 시작이지요. 그런데 왜 디즈니 제작진들은 첫 공개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 작품이 안데르센의 이야기인 '눈의 여왕'을 계승하는 작품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요? 눈을 씻고 찾아보면 눈의 여왕과 비슷한 점이 있긴 합니다. 안나의 복장을 보면 기존 디즈니의 공주들과 달리 샤방샤방함이 없고, 다소 터프한 편입니다. 이것은 눈의 여왕 초창기 삽화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겔다의 이미지를 참조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왕국에서 눈의 여왕역할을 맡고 있는 앨사가 춥고 외딴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짓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이 얼음성에 다다랐을 때, 눈으로 만들어진 군사들과 맞서 싸우는 장면도 원작과 비슷하다면 비슷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원작을 차용했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디즈니가 원작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병코선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겨울왕국은 개봉하기 무섭게 전 세계 어린이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폭발적인 인기도 인기지만, 평론가들로 부터 왕자타령이나 일삼는 기존의 낡은 옷을 벗어던졌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죠. 그러나 개봉 전 디즈니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습니다. 러시아 작은 영화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눈의여왕’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사건에서 알 수 있듯, 개봉 전 디즈니는 작품이 흥망에 대해 걱정과 고민이 많았습니다. 모든 창작애니메이션이 그러했듯 엘사와 안나 두 공주가가 이끄는 ‘겨울왕국’은 회사의 명운을 건 도박이었을지 모릅니다. 관객들에게 조금이나마 친근하게 다가서기 위해 기획단계에서부터 안데르센 원작을 엎고 가려던 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겨울왕국>의 원래 시나리오는 엘사가 악역에 가까웠다고 하는 데요, 눈의 여왕의 역할이 뒤바뀌고 자매의 가족애가 중심이 되면서 본의 아니게 원작스토리와 멀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패미는 아니고 그냥 진짜 멋진 여성들의 등장

작품 ‘눈의 여왕’에는 유독 여성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겔다와 카이를 데려간 눈의 여왕, 장미꽃을 파묻은 마법노파와 겔다를 풀어준 산적의 딸, 핀란드의 여인, 라플란드의 여인 모두 여자들이죠. 심지어 엔딩에서 이들에게 성경구절을 읽어준 사람도 할머니, 여성입니다. 눈의 여왕에게 잡혀간 카이와 카이를 닮은 왕자를 빼면 인간으로 등장하는 캐릭터 모두 여자입니다. 창작동화는 물론 전래동화를 통틀어도 여성들의 비율이 이정도로 높은 작품은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성비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기존의 안데르센의 작품에서 보아오던 여성들과 정반대의 여성상이 등장했다는 것인데요, 가슴앓이를 하다 죽음을 택하는 인어공주나 구두한번 잘못 신었다가 발목이 잘려나간 카렌, 빵을 밟고 흑탕물을 건넜다가 지옥에 빠진 소녀, 한 겨울에 맨발로 얼어 죽은 성냥팔이소녀처럼 안데르센동화의 단골인 허구언날 뭔가에 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여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세상 끝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가 등장합니다. 게다가 절대 죽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내 집으로 돌아오고 말죠. 지금의 눈으로 볼 땐 이게 뭐? 하며 의아해할 수 도 있습니다만 당시 겔다는 분명 흔치 않은 캐릭터였습니다. 작품 전반을 흐르는 청교도적 양념이 없었다면 여자가 나낸다는 황당한 이유로 금서로 지정된 바 있는 ‘오즈의 마법사’보다 더 험한 취급을 당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겔다는 엘리스보다 20년, 도로시보다 무려 55년이나 앞서 등장한 자기주도형 알파걸입니다. 여행의 동기만 놓고 보면 두 소녀보다 한 수 위입니다. 앨리스는 호기심을 쫒다 여행이 시작되었고, 도로시는 캔자스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죠. 그러나 겔다는 소중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앨리스나 도로시와는 달리 몇 번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기어코 세상 끝에 사는 눈의 여왕의 찾아갑니다. 이 용감하고 멋진 소녀가 앨리스나 도로시에 비해 세간의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눈의 여왕은 왜스케이트를 경품으로 걸었을까?     

“예전에 겨울이 되어 창문이 얼어붙으면 아버지는 그것을 가리키며 양팔을 벌린 처녀 같은 모습이라 하셨다. ‘저 여자가 나를 잡으러 온다.’ 라고 아버지는 장난을 치곤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침대에 누워 계시자 어머니는 그 일을 기억했고, 나도 역시 그 일을 생각해냈다. 어머니는 그 얼음 처녀가 아버지를 데려간 것이라 했다.”

- 안데르센 자서전 <내 인생의 동화> 중     

눈의 여왕에겐 독자의 뇌리 깊이 파고드는 강렬한 매력이 있습니다. 안데르센 특유의 섬세한  묘사 덕분에 우리는 그녀를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냉엄한 여왕로 기억합니다. 과자집 따위로 어린이를 낚아대는 동네 마녀들과는 확실히 급이 다랐죠.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눈의 여왕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은 물론 등장인물들에게 해코지를 한 적이 없습니다. 카이를 데려갈 때도 잡아갔다기보다 카이가 따라갔다고 보는 게 맞죠. 눈의 여왕은 작품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지면의 비중으로만 본다면 조연 중 조연이죠. 되돌아보면 그녀가 제대로 등장한 건 카이를 데려갈 때와 얼음궁전에서 카이에게 낱말 맞추기를 지시할 때 꼴랑 두 번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의 여왕’은 안데르센 동화집에 메인타이틀로 가장 많이 쓰이는 작품이면서 가장 많이 섭외되는 표지모델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제목을 맡고 있긴 하지만 주인공은 아닌 눈의 여왕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여왕은 카이에게 낱말 맞추기를 지시하면서 ‘영원(덴마크어: Evigheden)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면 세상과 함께 스케이트 한 켤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곤 홀연 외출을 나가버리죠. 여왕이 성을 비운 사이에 겔다가 도착합니다. 주인 없는 빈집에서 카이와 상봉한 겔다는 가슴에 박혔던 유리조각도 빼고, 부둥켜안고 기쁨의 춤을 추다가 낱말 맞추기도 클리어 하는 등 할 일 다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적의 딸을 비롯해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근황을 소개합니다. 집에 도착해서도 할머니가 읽고 있던 성경구절이 무엇인지까지 확인한 후에야 이야기는 끝을 맺는데요. 안데르센 특유의 장대한 엔딩씬 어디에도 눈의 여왕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데르센은 여왕을 잊은 걸까요? 외출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온 여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경품인 스케이트는 누구에게 어떻게 주죠? 그 전에 눈의 여왕은 왜 낱말 맞추기 경품으로 스케이트를 걸었을까요? 개인적으로 스케이트가 여기서 왜 등장했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뒤져봤습니다. 아쉽게도 1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그의 자서전과 두껍기로 유명한 안데르센 평전과 관련 논문 어디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이거 하나는 분명합니다. 스케이트 한 켤레로 안데르센은 아이와 어른 모두를 세상 끝 얼음왕국에 잡아둘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죠.    


      

안데르센의 고향도 아닌데러시아가 더 사랑한 동화     

안데르센 동화 중에 스크린에 가장 많이 걸렸던 작품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십중팔구는 인어공주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인어공주도 여러 가지 작품으로 각색되어 스크린에 소개된 건 맞습니다. 그러나 눈의 여왕만큼은 아닙니다. 눈의 여왕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화와 TV시리즈로 만들어졌는데요, 그 중 러시아에서 만든 작품이 가장 많습니다.

무려 1957년 개봉해 전 세계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장편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눈의 여왕을 최초로 실사화한 1966년 작, ‘겨울왕국’의 제목까지 바꾸게 만들었던 2012년부터 시작된 3D애니메이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지금까지도 눈의 여왕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배출해내고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 동화를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겔다가 눈의 여왕에 맞서는 스토리가 짜르에 맞서는 민중들 그러니까 러시아혁명 비유하곤 하는데요,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뇌피셜일 뿐입니다. 눈의 여왕이 구소련에서 특별히 사랑받았던 이유는 이데올로보다는 오히려 기후와 지리 때문일 것입니다. 눈의 여왕을 찾아 떠난 후 첫 번째로 나오는 지명은 라플란드입니다. 라플란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북쪽 끝 핀란드와 노르웨이 그리고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입니다. 산타마을로도 유명한 이 지역은 당시 유럽 사람들은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작품 속 겔다는 라플란드에서 핀란드로, 핀란드에서 또다시 여왕의 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진군합니다. 그랬다면 러시아 국경을 넘었을 것이고, 눈의 여왕의 성은 러시아 지역에 위치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눈의 여왕>뿐만 아니라 안데르센 작품에 대한 러시아사람들의 사랑은 안데르센의 고향인 덴마크 못지 않은데요, <얼음공주>, <성냥팔이 소녀>, <어머니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듯 안데르센은 추운 겨울풍경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작가입니다. 겨울이 유독 춥고 긴 러시아 사람들이 안데르센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지도 모릅니다.         


  

외로워서 그랬어(Feat.말하는 꽃과 동물들)     

카이를 찾아 나서면서 겔다는 자연물들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햇볕과 제비에게 말을 걸기도하고, 까마귀나 비둘기에게 카이의 소식을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을 걸어오는 생물들은 하나같이 대화가 쉽지 않습니다. 막상 겔다가 궁금한 걸 물으면 세 살 아이처럼 대답하거나 질문에는 답 대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다 끝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겔다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며 자리를 뜨곤 하죠. 이 어처구니없는 아무말 대찬치는 마녀노파의 꽃밭을 탈출하면서 방점을 찍습니다. 카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는 겔다의 질문에 참나리는 장례를 치르고 있는 힌두교 여인을, 나팔꽃은 성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에 대해, 데이지꽃은 그네를 타는 소녀들에 대해, 히아신스는 달밤에 춤을 추는 세 자매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만 늘어놓다 대화는 끝이나는데요, 수선화의 경우 그냥 지나치려하자 줄기로 종아리를 치기 까지 하면서 겔다를 붙잡죠. 짜증이 난 겔다는 식물들을 뒤로하고 주랭랑을 칩니다. 생물이 자랄 수 없는 바위에 다다른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쉴 정도였죠. 시간관계상 짧게 요약해서 전달해드렸습니다만 꽃들의 동문서답은 대체로 고전을 인용한 것들이며, 분량도 몇 페이지에 걸쳐 길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생물과의 대화는 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까마귀 부부는 잘못된 정보로 갈 길 바쁜 겔다를 엉뚱한 곳으로 인도했고, 라플란드와 핀란드를 거쳐 눈의 여왕을 만나기 직전까지 겔다를 태우고 길을 안내해주던 순록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한 후, 겔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말이죠.     

미학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꽃들의 아무말대잔치는 당시 평론가들과 지식인들에게 높은 미학적 교양을 자랑하기 위한 안데르센의 조금은 무모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는 꽃들과 동물들에게 외로움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앞서 이 작품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이라고 이야기 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그냥 여성이 아닌 모두 외로운 여성들입니다. 유일한 친구를 잃은 겔다와 그 겔다를 떠나보내며 혼자가 된 할머니, 주인공을 붙잡아두기 위해 기억까지 빼앗은 마법사노파, 라플란트의 여인과 핀란드 여인 심지어 끝판왕인 눈의 여왕까지 모두 혼자입니다. 모든 여정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난 산적소녀는 무리를 떠나 홀로 여행을 떠나고, 까마귀부부도 한 마리가 죽고 암컷만 홀로 남게 되죠. 이 작품을 통틀어 혼자가 아닌 사람은 카이 겔다 그리고 이들의 복선과 같은 왕자의 부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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