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노트는 빼곡하게 '?'가 달린 수첩의 별칭입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께서 적어주셨던 생활기록부에 그렇게 적혀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해가 떨어진 야산의 그림자 같은 존재' 였어요. 그만큼 존재감이 희미했다는 것이죠.
중학교 시절에도 특별한 목표가 없었고, 딱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하면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종종 어르신들이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머리만 긁적이곤 했었어요. 게다가 엄청 내향적인 성격이라 누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고 미움받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정을 주는 법이 서툴러서 친구도 많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억에 남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없어요.
근데 꼭 우울한 존재가 있으면 등장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도 그런 존재가 1명 있었습니다. 제가 어두침침한 아이였다면, 그 친구는 빛 그 자체였죠. 제가 자꾸 거리를 둬도 항상 먼저 다가오는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저는 밝음을 동경했지만, 그럴 수 있는 성격도 아니어서 매일 그 친구를 시기했습니다. 하지만 잡초처럼 밟아도 다시 살아나 끈질기게 붙다 보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됐죠. 그래서 제 학창 시절에 있었던 유일한 별명이 '해님과 달님' 이었어요.
그 친구는 중학생을 마지막으로 해외로 이민을 갔습니다. 워낙 어린 시절이어서 지금은 시집을 갔는지...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는 친구지만, 그 친구가 떠나기 전에 저에게 넌지시 꺼냈던 얘기가 있었어요.
"너 TV 좋아하니깐, 고등학교 올라가면 방송반 해보는 게 어때?"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방송부에 지원한 겁니다. 물론, 친구의 제안은 그냥 무시해도 되는 거였어요. 근데 괜히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방송부에 지원했습니다. 서류를 제출하기까지 뭔가에 홀린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지원한 이후에 뽑히기 위해서 노력도 했습니다. 젓가락을 물고 발음 연습도 하고 평생 불러본 적 없었던 노래도 연습했어요. 그땐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것마저 떨어지면 평생 그 친구를 볼 자신이 없을 것 같았나 봅니다.
그 당시 선배들이 저의 간절함을 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교생 중 6명만 뽑는다는 방송부의 일원이 됐어요. 하지만 동아리 활동을 제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력해서 이룬 성과였다 보니 악착같이 버텼었던 것 같아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다른 학교들과 연합해서 지역의 시민회관을 빌려 공연을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On-Air라는 단체였는데요. '연극, 다큐, 뮤직, 영화' 등 4가지 카테고리 중 하나를 1년 동안 갈고닦아서 많은 대중들 앞에 선보이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지금의 절 보면 믿지 못 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그 당시의 저는 말을 너무 안 해서 언어기능이 퇴화될 것이라는 소견을 받은 적도 있었던 '소심함의 결정체' 였어요. 그런 제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공포였죠. 그래도 했습니다. 의외로 재미가 있었거든요. 그 과정을 일일이 풀면 너무 긴 얘기가 되겠지만... 결과적으로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그밖에 누군지도 모를 많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껴봤어요.
성취감을 1번 경험하니, 계속 그 느낌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흔히 '성취감 중독'이라고 하죠? 저도 이 상태였어요.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일에 뭔가를 더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어떠한 확신과 목표를 갖고 임하게 됐죠. 하나는 '나는 동아리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전문적으로 해야겠다'였고, 하나가 '열심히 만든 영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라고요.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 무작정 방송이나 영화를 배울 수 있는 대학교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미술 계통의 학교들이라서 입시미술을 해야 되더라고요. 그 당시에 취미로 만화를 따라 그리긴 했습니다만, 애들 장난 수준이라서 도저히 실기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입시미술을 1달 정도 했었는데요. 불가능하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수시라는 제도를 알게 됐고, 홍익대학교에서 자율전공이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제도는 1년 동안 본인이 듣고 싶은 학과의 수업을 듣고 2학년 때 학과를 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어요.
물론, 이 방법도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왜냐면 제가 완전히 포기했었던 수학으로 면접을 봐야 했었거든요. 그래도 불가능한 미술보다는 공식이라도 달달 외우면 통과할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2달 동안 죽어라 수학만 팠습니다. 그 결과 이번에도 하늘이 저의 간절함을 알아줬었는지 면접 보기 직전에 차에서 봤었던 문제가 시험에 나와서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었어요.
대학교 1학년 과정은 정말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시기에 미대에 붙은 친구들은 모두가 탄탄한 실력자들이었거든요. 게다가 재수를 해서 들어온 형, 누나들은 1년 동안 입시미술 강사로 활동하다가 들어온 고수들이었습니다. 아그리파의 측면이 좋다, 정면이 좋다 와 같은 얘기들이 1년 내내 들렸었는데요, 저는 도저히 공감대 형성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물론, 제가 수업을 착실히 따라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 관련 학과의 인기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이 좋지 않아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왠지 낙오되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거 하나만 보고 그 고생을 했는데, 왠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재수한 형, 누나들을 괴롭혀가며 1년 과정을 억지로 따라갔습니다.
2학년부터는 진정으로 꿈꿔왔던 영화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시나리오 작성, 세트 제작, 기획, 프로듀싱, 편집, 사운드 믹싱 등 고등학생 시절에 높은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차근차근 허물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행복했어요. 게다가 저와 같은 관심사의 전공자들이 밖에 없는 환경이니깐 매일 새벽까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은 너무 즐거웠어요. 제가 가장 흥미 있는 것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4학년이 됐고, 첫 상업영화 스태프가 되어 필드로 나왔습니다. 너무 흥분됐고 신나서 그 두꺼운 시나리오 종이가 닳을 때까지 봤어요. 왜냐하면 그 영화는 제가 가장 좋아했던 교수님이 감독으로 연출하는 작품이었거든요.
하지만 사회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 냉혹했습니다. 배급사와 투자자들에 의해서 훌륭했던 시나리오 순식간에 수정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좌절하는 교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저처럼 꿈이 많았던 동기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두 눈에 새길 정도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결과물은 제가 처음에 봤던 시나리오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세간에서는 그럭저럭 볼만한 B급 영화로 기억됐죠. 너무 분했습니다. 그 당시에 선배나 동기들은 '우리가 이 판을 바꿔보자'라며 술잔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돈이 없으면 꿈을 이룰 수 없구나...' 라고요.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해 4학년 2학기에 취업계를 내고 회사에 취직했어요. 맨 처음에 들어간 회사는 전화영업을 하는 회사였습니다. 4년 동안 배운 것이라곤 영화 말고 없었던 제가 그나마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회사였거든요. 흔히들 전화영업을 TM이라고 합니다. 이게 제 첫 직업이었어요.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본인에게 맞지 않는 이상 잠시도 버티기 어려운 일입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면서 자괴감까지 몰려옵니다. TM은 그런 일이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이상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지 않은 권유에 대해서 상당히 불친절합니다. 설령 그게 본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거절부터 하죠. 그래서 시점을 뒤집어 봤어요. 필요한 사람들이 저를 찾아서 전화를 하게끔 말이죠. 그 당시 저는 '아웃바운드' 와 '인바운드'의 개념이 전혀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지만, 응당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믿고 실행했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하루 5시간씩 제안서를 제작했습니다. 미대를 나와서 여러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었지만, 디자이너들처럼 수월하게 할 수 없었고 기승전결이라는 기본적인 틀을 짜는 것도 어려워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중간에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지는 것 같아서 꾹 참고 끝끝내 제안서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여러 곳에 배포했죠. 배포가 시작되고 1주일이 지나자 제 자리의 전화벨이 처음으로 울렸습니다. 아직도 그분 목소리가 기억이 나요. 대단히 차분하고 두꺼운 목소리를 갖은 분이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그분이 처음으로 꺼냈던 말이 "강훈구씨 계약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였습니다. 그렇게 텔레마케팅의 기본 틀을 깰 수 있었어요.
요즘도 전화영업이 종종 들어오면 끝까지 들어주고 '고생 많으십니다. 하지만 저에겐 필요치 않은 제안이네요. 수고하세요.'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겠죠. 누군가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겠지만, 저는 이렇게 얘기를 해주면 대단히 고마웠거든요. 실제로 저한테 전화영업을 하셨던 몇몇 분들은 엉엉 우신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시는 많은 TM분들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도 내일도 파이팅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나름 말주변이라는 것도 생겼고, 저라는 인간의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다음에 하게 된 일은 마케팅이었습니다. 새로운 영업 전술로 성과가 나름 좋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어요. 하지만 더 큰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벌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마케팅'이라는 것을 찾게 됐습니다.
영업 조직에서 나름 윤택한 삶을 살았어요. 하지만 더 벌려면 그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기 위해 마케팅 교육을 주력사업으로 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그 회사는 교육사업도 하면서 FM으로 대행사업도 병행하는 회사였습니다. 마케터로 살아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여러 업체를 동시에 대행하다 보면 제 생활이라는 것이 없어져요. 게다가 매월 초와 말에 리포트를 만드는데, 이게 보통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데이터만 취합해서 전달하면 편했었겠죠. 하지만 이번엔 뭐가 잘못됐으며 어떻게 해야 다음 달 매출이 올라갈까를 끊임없이 궁리해야 했기 때문에 뭐만 하면 철야였습니다. 얼마나 집을 안 들어왔었는지, 반려견도 절 몰라보고 왕왕-! 짖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1년 정도 무리를 하다가 크게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체계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1년 정도 죽어라 하다가 회사를 벗어나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의 회사 월급은 일하는 것에 비해 너무 적었거든요. 물론, 혼자 나가진 않았어요. 저는 생각보다 겁이 되게 많거든요. 그런 겁쟁이가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손발이 잘 맞았던 팀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깐 죽어라 달리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6개월 정도 하다가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도 공감하시겠지만, 트렌드가 너무 빠르게 변하더라고요. 마케팅은 직업 특성상 변화의 흐름을 놓치면 안 되는 직업입니다. 그 당시의 저는 제가 갖고 있는 마케팅 솔루션이 영원할 줄 알았었거든요. 근데, 한 번 판이 변하니깐 무너지더라고요. 당시 저의 사업은 핵심 기술이 1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구축할 때 걸렸었던 시간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분해됐습니다. 이때 너무 속상하고 충격을 받아서 공황장애도 오고 1달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이 시기에 부모님과 같이 투자했었던 이화여대 근처의 상가도 사기를 맞았었어요. 뭐... 최악이었죠. 죽으면 끝날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만 했었던 제가 이렇게 크게 넘어질 줄 몰랐었거든요.
제가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된 계기는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 덕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 강아지도 죽을 위기에 있었거든요. 디스크가 크게 도져서 사지가 마비됐었어요. 제가 집에서 유일하게 하던 일은 강아지를 마사지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근데, 이게 정말 못할 일이더라고요. 얘가 움직이지를 못 하는 데다가 말도 할 수 없는 동물이니깐, 누워있는 그 상태로 똥, 오줌을 쌌어요. 게다가 한 자세로 계속 누워있으면 피가 순환되지 않아서 피부병도 생겼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안락사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이라도 마음껏 먹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침울하게 살았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사지를 하러 거실로 갔는데, 항상 누워있어야 할 곳에 강아지가 없더라고요. 그 녀석이 어디로 갔었을까요? 바로 화장실이었습니다. 사지가 마비되어 거동도 안 될 녀석이 화장실 바닥에 누워서 똥과 오줌을 쌌더라고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 못 하는 강아지도 가족들이 걱정을 하니까 제 역할을 하려고 이렇게 사력을 다하는데, 주인이라는 인간이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무일푼,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찾은 것이 막노동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실패를 하더라도 내가 벌어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껴보고 싶었죠.
그 당시에 코레일에서 용역을 주는 것들이 있었는데요. 전철 역마다 있는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엄청 무겁기도 하고 먼지도 장난 아니게 많이 나는 작업이에요. 일 끝나고 마스크 벗으면 정말 새까맣게 돼 있었거든요. 게다가 일하는 시간도 저녁 11시부터 시작을 해서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진행됩니다. 저녁에는 이렇게 일을 했었고 낮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소상공인들의 마케팅을 도와주면서 돈을 벌었어요. 정말 닥치는 대로 일만 했었습니다. 그렇게 3달을 사니깐 어느 정도 안정적인 소득이 생기더라고요.
막노동이 힘들긴 했지만, 금방 적응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충분히 밥은 벌어는 먹겠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고민했던 것이 '뭘 해야, 평생 벌어먹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오늘날 '평생직장'은 없어요. '평생 할 수 있는 직업'만 있죠. 그래서 고민했던 것이 부동산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이 부동산의 자산을 늘렸고, 일을 하지 않아도 수익형 부동산으로 안전한 소득을 얻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부동산 공부는 이때부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바닥을 경험해봤었고... 저희 가족을 바닥으로 보내려던 부동산을 제 힘으로 이기고 싶었어요. 제가 생각한 승리는 '부동산으로 큰돈을 버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제 블로그 닉네임이 '물음표노트' 잖아요? 이건 그 시절에 만들어진 제 연습장의 별칭입니다. 제가 지은 것은 아니었고요. 저희 아버지가 일하시는 상가의 부동산 개업 공인중개사분이 지어주신 것입니다. 노트에 빼곡하게 질문이 적혀있어서 지어진 별칭이었죠.
저는 사장님이 필요로 하는 마케팅을 도와드렸었고, 사장님은 그 대가로 매일같이 물음표노트의 궁금증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경공매도 배울 수 있었고 임대차에 대해서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어요. 그중에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시장에 대한 인사이트였습니다. 거래되는 규모가 아주 컸었고 수익도 엄청났었기 때문에 자산을 증식하는데 이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이 나오더라고요. 이게 평생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도 이때 생겼죠.
하지만 동네에 있는 부동산에서는 토지 투자를 배우기가 너무 어려웠었습니다. 웬만한 규모가 되지 않고서는 토지 매물이 잘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토지 관련 회사들을 찾았습니다.
리스트 업을 쫙 했지만, 자격조건이 맞는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장 큰 한계점은 바로 나이었어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은 뽑아주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중에서 가장 진입장벽이 낮았던 경매 회사와 기획부동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마침 마케팅팀을 뽑고 있었거든요.
경매 회사나 기획부동산은 투자자의 입장에서 해로울 수 있어요.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부분이 일확천금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곳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1일 만에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속성으로 토지에 대해서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곳이었기에 계속 다녀 봤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다단계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땅 자체가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었어요. 앞에서 교육하는 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무조건 좋은 땅'이라고 설명을 하니까요. '확신이 있으니 저러는 것이겠구나, 그럼 나도 사야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때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좋은 땅은 없어요'
나름 이성적인 사람도 엉겁결에 땅을 사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획부동산의 힘이고 망하지 않는 이유에요. 솔직히 논리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버리니까요. 모두가 세뇌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합니다. 이건 전문가 집단이라기보다는 사이비 종교 같은 느낌이었어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 는 것을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들었던 제 입장에서도 혹할 정도였지만, 사례가 있었던 터라 거리를 두며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부동산 강연과 심도 있는 공부를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었죠.
이런 종류의 회사들이 노리는 것은 사람들의 욕심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이를 자극할 줄 알죠. 그래서 이를 기반으로 그럴싸한 정보를 날조해 투자자들 또는 지인들의 기대 심리를 한껏 높입니다. 그래서 투자자가 이 단계에 발을 담그는 순간 객관적인 판단이 서지 않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이성이 아닌, 감정의 영역이며... 체계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으로 진행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종종 말씀드려요. '귀로 하면 투기, 눈으로 하면 투자' 라고요.
이 글을 기획부동산 업자분들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적은 글들은 그네들에게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고 분쟁을 유발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에요. 누군가가 피 땀 눈물을 흘려가며 번 돈을 가볍게 보는 질 안 좋은 행위에요. 그걸 하면서 어디 가서 부동산 한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기획부동산에 있으면서 1년 가까이 조용히 살았어요. 옛날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왜 나쁜지를 분명히 알았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2년 전만 해도 제가 부동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단 1명도 없었어요. 아, 부모님은 제외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 있는 남동생도 제가 뭘 하는지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숨겼어요.
하지만 이제는 자신 있게 얘기합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공인중개사를 비롯해 세무, 법무, 토목, 금융에 이르는 다양한 전문가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 상위 10% 안에 드는 고액의 연봉자도 잡체인지를 하실 정도로 내실 있는 회사입니다. 심지어 투자를 하러 오셨다가 브리핑을 들어보고 취업을 하신 분도 있어요.
우리 회사는 흔한 기획부동산과 달리 조직 자체가 진취적입니다. 경매 회사나 기획부동산처럼 5시 이후에 불이 꺼지는 경우가 없어요. 저는 대치동과 거리가 멀다 보니 일찍 들어가는 편이지만, 자차가 있고 인근에 집이 있는 분들은 매일매일 새벽 1, 2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다음날 업무 및 브리핑 준비를 합니다.
이들이 돈벌이가 없어서... 큰돈을 확 당기고자 이렇게 간절히 일을 할까요? 이분들의 연봉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겁니다. 아, 참고로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6걸음만 걸으면 닿을 거리에 계신 분은 매달 웬만한 상위 직종의 연봉을 월급으로 받아 가십니다. 이런 우수한 인력들이 토지에 국한되지 않고 주택, 상업용 부동산(오피스텔, 상가) 등 국내 부동산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물건들을 취급하고 있어요.
부동산 회사는 철새들이 많다고 하죠? 하지만 다른 회사로 이동하는 철새들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동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른 회사에서 제안하는 조건이 지금보다 메리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리고 그 혜택이 앞으로 더 커져나갈 거라고 모든 구성원들이 믿고 있어요. 즉, 우리 회사에는 그런 멍청이가 있지 않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는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수원으로 워크샵을 떠납니다. 놀러 가냐고요? 천만에요. 오전 9시부터 7시까지 교육 스케줄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부터 교육이 이어지고요. 이 모든 강연들은 회사 내부의 임직원분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초청강사분들이 옵니다. 저도 뒤늦게 커리큘럼을 확인해 봤는데요. 최소 몇 백만 원은 줘야 초청이 될 명사들이 오십니다. 이렇듯 제가 다니는 임직원분들은 안주하는 것을 모르시고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투자를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그리고 빠르게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겠죠.
적다 보니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꾹 눌러 담은 것 같네요. 아무래도 워낙 예전부터 동경했었던 곳이라 그런지 저한테 다가오는 의미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어요.
적다 보니 글이 매우 길어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여러분들에게 부동산 투자 정보를 전달하는 물음표노트 강훈구의 자기소개였습니다. 다소 긴 글이지만, 투자를 진행하시는 분들에게 이 정도는 보여드려야 저라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실 것 같아서 적어봤어요. 이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원문 : 물음표노트(https://goo.gl/Vqr6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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