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용사의 골동품 상점

by 김경훈

수도 마도르의 굽이진 뒷골목 가장 깊은 곳에는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낡은 골동품 상점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이 상점의 주인은 과거 마왕군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기며 대륙의 평화를 이끌었다는 전설적인 소문의 주인공 전직 용사 엘리야이다.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는 화려한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그는 그저 물 빠진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도수 높은 돋보기안경을 낀 채 상점 구석에 쌓인 먼지 묻은 마도구들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평화로운 소일거리를 즐기는 평범한 중년 상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발치에는 현역 시절 전장을 함께 누볐던 듬직하고 영리한 은퇴한 군견 탱고가 언제나처럼 엎드려 있다. 탱고는 나이가 들어 털빛이 희끗희끗해졌지만 주인을 향한 충성심과 마물을 감지하는 날카로운 감각만큼은 전성기 못지않게 살아있는 훌륭한 파트너이다.


어느 평화롭고 나른한 오후 엘리야는 가게 안쪽의 비좁은 창고를 정리하다가 시선을 끄는 쓸만한 물건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현역 용사 시절 화염의 산맥을 토벌할 때 전리품으로 얻었던 화염 저항의 망토였다. 붉은 샐러맨더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정교한 마법진을 수놓은 이 망토는 웬만한 불길에는 그을림조차 생기지 않는 최고급 마도구였다. 하지만 이제 평범한 상인으로 살아가는 엘리야에게 모험을 떠날 일은 없었으므로 이 귀중한 망토는 그저 창고의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그는 왕국 사람들이 중고 물품을 거래할 때 널리 애용하는 주황색 마법 게시판에 이 망토를 매물로 올리기로 결심했다. 엘리야는 질 좋은 양피지를 꺼내어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로 판매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화염 저항의 망토를 급하게 처분하며 흠집 하나 없는 최상급 상태이고 가격은 금화 백 닢이며 가격 흥정은 절대 사절하니 상도덕을 지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양피지를 마법 게시판 네트워크에 등록하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가게 안을 채우고 있던 정적을 깨고 경쾌한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매우 빠른 속도로 엘리야의 판매 글을 보고 마법 통신을 걸어온 것이다. 엘리야는 바닥에 엎드려 있던 탱고의 부드러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여유로운 태도로 통신석을 집어 들었다.



학생이라는 핑계와 수상한 파장


통신석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듯한 아주 앳되고 동시에 몹시 건방진 느낌을 주는 소년의 음성이었다. 소년은 인사조차 생략한 채 대뜸 게시판에 망토를 올린 사람이 맞느냐고 물으며 자신은 현재 마법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인데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학생이라는 신분을 강조하며 망토를 그냥 무료로 나눔 해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이어갔다.


엘리야는 소년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수십 년간 상점을 운영하며 온갖 종류의 진상 손님을 다 겪어보았지만 일면식도 없는 타인에게 이토록 당당하게 전액 할인을 넘어선 무료 나눔을 요구하는 뻔뻔함은 실로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엘리야는 차분한 목소리로 학생이 돈이 없으면 마법 도서관에 가서 학업에 매진할 일이지 왜 비싼 마도구를 탐내느냐고 꾸짖으며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엘리야가 통신석의 연결을 끊으려 하는 찰나 소년이 다급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시 소리쳤다. 소년은 엘리야를 향해 사람이 왜 그렇게 정이 없고 각박하냐며 늙은이가 비싼 망토를 쓸 일도 없을 텐데 자라나는 새싹에게 양보를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느냐고 적반하장격으로 따져 물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망토가 필요한 아주 절박한 사정이 있다며 정 물건을 주지 않겠다면 지금 당장 수도 남쪽의 버려진 공터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자신이 직접 만나서 설득을 해보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엘리야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억지라고 생각하여 통신을 무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엘리야의 발밑에서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군견 탱고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탱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허공의 냄새를 맡더니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낮고 위협적인 으르렁거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탱고는 단순한 개가 아니라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마물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극한으로 발달한 훌륭한 사냥개였다. 통신석 너머로 미세하게 전해지는 기묘한 마력의 진동과 희미하게 섞여 들어오는 매캐한 유황 냄새에 탱고의 야성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엘리야의 평온했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좁아졌다. 통신석 너머의 상대방이 뿜어내는 마력의 파장은 결코 평범한 마법 아카데미 학생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억눌러두었던 은퇴한 용사의 투쟁심과 진상 손님을 응징하려는 늙은 상인의 오기가 동시에 엘리야의 마음속에서 불타올랐다. 엘리야는 소년에게 공터로 나가겠다고 대답하며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면 아주 합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대야 할 것이라고 서늘하게 경고한 뒤 통신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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