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원자력 ‘유턴’과 2억 유로의 도박
2026년 3월,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민간원자력 정상회의의 공기는 뜨겁다 못해 절박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원자력을 ‘처분해야 할 구시대의 유산’으로 취급하던 유럽이 이제는 이를 ‘에너지 주권의 핵심’이라며 앞다투어 모시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전략적 실수였다”라는 고백은 중동 사태와 이란 전쟁이 던진 거대한 에너지 독촉장에 대한 뒤늦은 답변이다.
‘탈원전’이라는 이름의 뼈아픈 오판
1990년 유럽 전력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원자력은 현재 15%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깨끗하고 저렴한 발전원을 외면한 대가는 혹독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스관이 잠기고,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기름길이 막히자 유럽의 산업 경쟁력은 수직 낙하했다.
특히 탈원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자성은 드라마틱하다.
마지막 원전 3기를 끈 지 1년여 만에, 독일은 날씨에 따라 널뛰는 재생에너지의 빈틈을 메우려 다시 가스발전소를 짓는 모순에 빠졌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의 “후회스럽다”라는 토로는 한 번 해체된 시스템을 복구하는 것이 신규 건설만큼이나 어렵다는 기술적 절망감을 담고 있다.
AI와 로봇, 그리고 ‘전기 먹는 하마’의 시대
유럽이 이토록 원자력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순히 난방비 때문이 아니다.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대변되는 차세대 산업 혁명은 그야말로 ‘전기를 먹는 하마’다.
저렴하고 풍부한 전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유럽의 첨단 산업은 미국과 중국의 속도전에서 영구히 도태될 수밖에 없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원자력을 ‘탈탄소와 일자리, 주권’을 동시에 잡는 도구로 정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석 연료가 지정학적 볼모가 되는 시대에, 원자력은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거의 유일한 대형 발전원이다.
이제 유럽 내에서 원자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생태계의 ‘생존 로그’가 되었다.
SMR과 2억 유로의 추격전
유럽은 이제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에 2억 유로를 투입하며 반격을 준비한다.
미국과 중국이 혁신의 최전선에서 달리는 동안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심산이다.
탄소배출권 거래 수익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는 모습에서 유럽 특유의 실용적 절박함이 읽힌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도 부각된다.
대형 원전과 SMR 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며 전 주기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는 한국은 유럽이 우라늄 공급망 다각화와 방사성폐기물 처리를 위해 손을 잡아야 할 핵심 파트너다.
34개국에서 38개국으로 늘어난 참가국 명단은 원자력 부흥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전 지구적인 ‘시스템 복원’ 과정임을 증명한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그 실수를 데이터로 삼아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는 것은 지성체의 영역이다.
유럽의 원자력 유턴은 ‘안전’이라는 가치와 ‘생존’이라는 실재 사이에서 인류가 내린 고통스러운 중용의 선택이다.
우리가 버렸던 낡은 배터리가 사실은 미래를 돌릴 유일한 동력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역사는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2026년의 대학 교정에서 AI 가이드라인을 고민하는 학생들에게나, 엘리제궁에서 원전 증설을 외치는 대통령에게나 ‘에너지 리터러시’는 이제 교양이 아닌 생존의 필수 문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