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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안경과 언어로 본다는 것

by 김경훈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젊은 시절 언어라는 완벽한 자를 만들어 세상의 모든 것을 재단하려 했다.

그는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의 구조를 고안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그림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현실을 일대일로 반영해야 하며, 현실에 대응하는 대상이 없는 즉 신, 영혼, 도덕과 같은 단어는 무의미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바탕으로 개발된 최첨단 인공지능 안경을 상상해보자.

한 시각장애인 연구자가 이 안경을 착용하고 현실을 탐색한다.

이 안경은 눈앞의 사물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주는 장치로 설계되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 앞에 멈춘다.

안경은 말한다.

네 개의 다리와 등받이가 있는 나무 의자.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묘사다.


하지만 곧 안경은 혼란에 빠진다.

바닥에 놓인 소파 앞에서 이 사물이 의자의 본질적 속성인 ‘다리’와 ‘등받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린다.

고심 끝에 안경은 이렇게 말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형의 착석 가능 물체.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작 앉을 곳을 찾는 사용자에게는 지나치게 불친절한 정보다.

이것은 본질주의적 언어관이 현실의 유용성과 충돌하는 지점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훗날 이 한계를 인정했다.

그는 후기 철학에서 단어의 의미가 고정된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방식 즉 ‘언어 게임’ 안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게임’에 공통된 본질은 없듯, ‘의자’ 역시 어떤 고정된 정의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들은 서로 닮은 점이 있을 뿐 단 하나의 기준으로 묶이지 않는 ‘가족 유사성’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스크린리더를 통해 세상을 듣는 시각장애인의 일상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스크린리더가 전달하는 정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것은 현실의 완벽한 복제가 아니다.

현실을 이해하고 탐색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서이다.

예를 들어 ‘버튼’이라는 단어 하나가 그것이 웹사이트에 있을 때와 엘리베이터에 있을 때, 사용자에게 요구하는 행동과 의미는 전혀 다르다.

문맥이 의미를 결정짓는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이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적 완전성을 추구하던 한 천재가 불완전하고 애매하지만, 살아 숨 쉬는 언어의 세계를 인정하고 긍정하게 되는 여정이다.

정보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이 여정은 큰 교훈을 준다.

위대한 기술이란 세상을 자신이 만든 논리 체계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며,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 더 나은 소통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안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라는 안경 자체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성찰의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접근성과 기술 윤리를 위한 출발점이다.

우리는 이제 언어의 완벽함을 꿈꾸기보다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끌어안고도 더 나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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