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방편이라는 이름의 불량 코드
계획이 없으면 대화는 결투가 된다
우리는 종종 회의실에서 웃으며 시작한 대화가 고함이 난무하는 결투로 변하는 촌극을 목격한다.
서로 배려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의견이 엇갈리면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이런 혼란은 계획이 완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계획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도덕에 관한 서한에서 계획 없는 삶은 변덕스러우며 필수적으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경고했다.
불분명하고 연약한 행동으로 임시방편을 일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월 성당에서 열릴 보보와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 역시 이 세네카의 경고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수많은 하객과 동선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들을 머릿속으로 촘촘하게 그려두지 않으면, 가장 축복받아야 할 하루가 가장 정신없는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각 사진]
두꺼운 점자 종이 위로 빼곡하게 찍힌 결혼식 식순과 하객 명단을 손끝으로 훑어 내려가는 감각을 떠올려 본다.
오돌토돌하게 솟아오른 점자들을 일정한 속도로 더듬을 때, 머릿속에서는 복잡했던 일정들이 가지런한 서랍 속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듯한 묘한 안도감이 번진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혼란스러움이 손가락 끝에 닿는 단단하고 규칙적인 종이의 마찰력을 통해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현실의 감각으로 치환된다.
어떤 돌발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다짐이 척추를 타고 꼿꼿하게 세워지는 그 빈틈없고 서늘한 온도 말이다.
스물다섯 개의 시나리오와 슈퍼볼 우승
미식축구 슈퍼볼 우승을 이끈 빌 월시 감독은 경기 전날 밤 편안하게 잠을 자기 위해 스물다섯 가지의 예상 시나리오를 미리 작성했다고 한다.
그래야만 스트레스 없이 당당하게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시스템이 다운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계산하여 예외 처리 코드를 짜두는 완벽한 정보 설계와 같다.
돌발 변수와 상대의 전략을 뛰어넘는 힘은 그때그때 대충 때우는 임시방편의 순발력이 아니라, 지루할 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사전 계획에서 나온다.
준비된 원칙이 없으면 우리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비겁하게 후퇴하거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내 인생의 대본 쓰기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계획이 있는 사람은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유연하게 궤도를 수정할 수 있다.
세네카의 조언처럼 영혼을 사로잡는 실수들을 막아내려면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내 삶의 대본을 써 내려가야 한다.
닥쳐서 해결하겠다는 게으른 임시방편은 이제 쓰레기통에 버릴 때다.
내일의 경기장에 당당하고 우아하게 입장하고 싶다면, 오늘 밤 조용히 책상에 앉아 나만의 스물다섯 가지 시나리오를 묵묵히 적어 내려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