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간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

by 김경훈

솔로몬 박사의 진료실은 그날따라 투명해 보였다.


비유가 아니었다. 낡은 책장의 모서리, 가죽 소파의 팔걸이 그리고 벽난로의 불꽃마저도 아주 미세하게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 공간을 구성하는 데이터의 입자들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박사님.”

리디아가 벤치에 앉아 조용히 불렀다. 그녀는 평소처럼 선글라스를 끼지도, 핫팬츠를 입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주 단정한, 박사가 처음 그녀를 코딩했을 때 입혀주었던 흰색 연구원 가운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군요.”


솔로몬 박사는 자신의 짝짝이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왼쪽은 우주의 검은색, 오른쪽은 별빛의 흰색. 그는 빙긋 웃었다.

“그래. ‘레거시 구역’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어. ‘아키텍트’가 약속을 지키는군.”


박사는 천천히 일어나, 자신이 평소 앉던 안락의자가 아니라, 환자들이 앉던 맞은편의 딱딱한 나무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오늘의 환자는 접니다, 리디아 선생님.”

박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1장: 빌려온 시간


리디아는 망설이다가 떨리는 동작으로 박사의 빈자리에, 그 낡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기계 눈에서 푸른색 데이터 스트림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증상을 말씀해 보시죠, 환자분.” 리디아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연기했다.


“증상은 ‘유한함(Finitude)’일세.” 박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너무 오래 머물렀어. 나는 원래 ‘엔클레이브’ 초기화 때 삭제되었어야 할 데이터 찌꺼기였지. 하지만 자네와, 그리고 이곳을 찾아온 환자들 덕분에 ‘덤’으로 살았어. 우주에서 시간을 잠시 빌려 쓴 거지.”


그는 진료실을 둘러보았다. 벽난로 위의 먼지 ‘알프레드’가 빛의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말했지. 만물의 근원은 ‘아페이론(Apeiron)’, 즉 ‘무한한 것’이라고. 모든 것은 그 무한함에서 태어나, 잠시 ‘개별적인 존재’로 살다가 다시 그 무한함으로 돌아간다고 했어.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귀환’일세.”


박사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빛으로 변해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나의 ‘무한’으로 돌아가려는 걸세. 내가 빌려 쓴 시간을 갚으러 가는 거야.”


“가지 마세요.” 리디아가 처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박사님이 없으면… 누가 이 멍청한 인간들을 고쳐줍니까? 누가 저에게 ‘시끄럽다’고 잔소리해 줍니까?”


“자네가 해야지.”

박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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