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병동과 찢어진 기록

by 김경훈

세상 사람들은 빛이 진실을 보여준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빛은 단지 화려하게 포장된 거짓의 껍데기를 비출 뿐이다.

시각이 완벽하게 차단된 나의 어두운 세계에서 진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숨어 있다.

타인의 고통을 짓밟고 쌓아 올린 탐욕은 썩은 고기보다 더 역겨운 악취를 풍긴다.

나는 빛을 잃은 사설탐정 엘리야다.

무력한 맹인의 탈을 쓰고 부패한 권력자들의 가장 은밀하고 살진 사냥감을 가로채는 눈먼 사냥개다.

나의 곁에는 언제나 나의 눈을 대신하는 완벽한 공범 래브라도 리트리버 탱고가 일정한 보폭으로 걷고 있다.

나는 값싼 정의나 도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악당들이 흘린 피 묻은 돈을 훔쳐내어 나의 사랑하는 보보와 함께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하고 따뜻한 성을 쌓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어둠의 뒷골목에는 악당들의 비밀을 돈으로 환산하는 거미줄 같은 정보망이 존재한다.

나는 장물을 현금화하거나 쓸만한 사냥감을 물색할 때 케이라는 이름의 정보원과 거래를 한다.

케이는 향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오래된 전당포를 운영하며 이 도시의 온갖 더러운 소문들을 수집하는 자다.

어제저녁 케이는 나에게 아주 흥미롭고 값비싼 냄새를 풍기는 정보를 하나 넘겨주었다.

수십 년 전 인권 유린과 불법 생체 실험 논란으로 폐쇄된 백자작 정신병원의 폐쇄 병동에 거대 제약 회사의 치명적인 비밀 문서가 아직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제약 회사는 과거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상대로 불법적이고 치명적인 임상 실험을 강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병원장은 그 실험의 대가로 막대한 뒷돈을 챙겼지만 훗날 자신을 보호할 보험으로 모든 실험의 기록과 제약 회사의 자금 흐름이 담긴 원본 문서를 폐쇄 병동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그는 며칠 전 교도소에서 심장 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케이의 정보에 따르면 제약 회사는 병원장의 입이 영원히 다물어진 지금 그 끔찍한 기록을 완전히 폐기하기 위해 오늘 밤 전문 용병들을 그 버려진 병원으로 파견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문서를 불태우기 전에 먼저 그것을 훔쳐내어 제약 회사의 경쟁사나 혹은 제약 회사 회장 본인에게 수백억 원을 뜯어낼 완벽한 협박의 도구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나는 탱고의 하네스를 잡고 도시 외곽의 인적 끊긴 산속에 자리 잡은 버려진 정신병원 앞에 도착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된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은 산바람을 맞으며 기괴하고 우울한 공명음을 내고 있었다.

나의 청각은 건물의 깨진 창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소리를 해독하며 이 폐허의 구조를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병원 입구로 다가가자 아주 짙고 무거운 곰팡이 냄새와 부식된 철근의 비릿한 냄새가 나의 폐부를 찔렀다.

그리고 그 오래된 폐허의 냄새 밑바닥에는 과거 이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고통과 체념이 섞인 크레졸 비누 용액의 지독한 악취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나는 탱고에게 은밀한 수신호를 보내며 소리 없이 병원의 일층 복도로 스며들었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이나 잔해들을 피하는 것은 지팡이 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과 탱고의 완벽한 리드로 충분했다.

병원의 내부는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무덤과 같았다.

시각에 의존하는 자들에게 이 어둠은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안식처이자 완벽한 사냥터였다.

나는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의 방향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읽으며 목적지인 지하 이층의 폐쇄 병동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갑고 미끄러웠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하의 깊은 곳에서 고여 있던 서늘한 공기가 나의 뺨을 쓸어 올렸다.

지하 이층의 철창문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거칠게 절단되어 있었다.

절단기에서 발생한 강한 마찰열과 금속이 타들어 간 매캐한 냄새가 아직 공기 중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제약 회사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이미 나보다 앞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팡이를 접어 품에 넣고 벽면에 등을 밀착한 채 기척을 완전히 죽였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경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안내견 탱고의 눈으로 길을 보고, 시각장애인 연구자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1,16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97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22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해커 마법사와 구독형 지팡이의 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