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성시대.
세상은 생성형 AI가 가져온 혁명에 열광한다.
몇 번의 프롬프트 입력만으로 복잡한 문서를 요약하고, 가장 저렴한 비행기 표를 검색하며, 순식간에 행정 서류를 처리한다.
기술은 시간을 절약하고 선택권을 무한대로 넓혀주는 마법 지팡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눈부신 속도전의 이면에는 그 마법 지팡이를 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디지털 사회의 입구에서 맴도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데이터 빈곤층’이라 부른다.
데이터 빈곤은 단순히 스마트폰 요금제를 넉넉히 쓰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접속, 기기, 접근성, 그리고 활용 역량이라는 네 겹의 거대한 성벽에 가로막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대리인’에게 구걸해야만 하는 참담한 배제의 결절점이다.
이것은 ‘스마트’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느 최첨단 행정복지센터에서 사람의 온기를 지워버린 차가운 무인 단말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려난 한 노인과, 그 자동화된 배제의 논리를 날카롭게 해체한 서늘한 봄날의 기록이다.
스마트 행정복지센터의 그림자
새롭게 문을 연 ‘스마트 행정복지센터’.
김경훈은 보보의 안내를 받으며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야심 차게 도입한 ‘AI 기반 무인 민원 시스템’의 시범 운영 공간으로, 김경훈은 접근성 영향 평가를 위해 자문위원 자격으로 방문했다.
센터 안은 조용했다.
번호표를 뽑고 창구에서 대기하는 소음 대신, 매끄러운 기계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기야, 여기 창구 직원이 한 명도 없어. 전부 다 사람 키만 한 키오스크로 바뀌었네.” 보보가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그때, 센터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AI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한 어르신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내사 마, 뭐라 카는지 하나도 모루겠네. 아가씨, 이거 우째 하는 교?”
올해 일흔다섯 살의 휠체어 이용자, 박순자 어르신이었다.
어르신은 기초생활수급 및 장애인 연금 갱신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왔지만, 번쩍이는 터치스크린 앞에서 십 분째 멈춰 서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이번 시스템 개발을 담당한 시청의 IT 정책팀 최윤석 주무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어르신, 이거 화면에 대고 말씀하시면 AI가 다 알아서 해줍니다. 자, ‘연금 갱신’이라고 또박또박 말씀해 보세요. 아니면 저희 센터 앱을 스마트폰에 깔아보시겠어요?”
박 어르신이 낡은 폴더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
“내사 그런 거 몬 깐다. 알뜰폰이라 데이터도 없고, 눈도 침침해서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얼어 죽을 앱이고. 그냥 사람 좀 불러달라 카이.”
네 겹의 빈곤과 자동화된 배제
김경훈은 지팡이를 짚고 다가가 최윤석 주무관에게 말을 건넸다.
“최 주무관님, 어르신께 앱을 깔라고 하는 건 해결책이 아닙니다. 이 상황이 바로 완벽한 ‘데이터 빈곤’의 현장이거든요.”
최 주무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박사님 오셨습니까. 하아, AI 음성 인식을 도입해서 제일 접근성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휠체어 타신 어르신들 목소리는 마이크에 잘 닿지도 않고, 사투리 인식률도 아직 떨어지네요.”
김경훈이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했다.
“데이터 빈곤층은 단순히 통신비가 없는 집단이 아닙니다. 지금 박 어르신을 보십시오. 첫째, 데이터 요금과 최신 기기를 살 소득이 부족한 ‘접속의 빈곤’. 둘째, 폴더폰으로는 스마트 행정 앱을 깔 수 없는 ‘기기의 빈곤’. 셋째, 휠체어 높이와 노안을 고려하지 않은 터치스크린이라는 ‘접근성의 빈곤’. 넷째, 이 모든 오류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역량의 빈곤’. 이 네 겹의 빈곤이 어르신을 디지털 시민이 아닌, 무권리 상태로 밀어내고 있는 겁니다.”
보보가 덧붙였다.
“등록장애인의 절반 이상이 육십오 세 이상 고령자이고, 월평균 소득은 전국 가구 평균의 육십 퍼센트 수준에 불과해요. 이런 다층적인 취약성을 가진 분들에게 최신 기술에 적응하라는 비용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폭력이죠.”
무인(無人)은 곧 무권리(無權利)다
최 주무관이 항변했다.
“하지만 박사님, AI 시대잖아요. 국민의 과반수가 생성형 AI를 쓴다는데, 행정도 발을 맞춰야죠. OECD에서도 AI가 장애인의 삶을 돕고 보조공학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기술의 가능성은 훌륭하죠.”
김경훈이 인정했다.
“하지만 OECD가 동시에 지적한 것도 명심해야 합니다. 좋은 학습 데이터의 부족, 기술 성숙도의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편견은 AI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죠. 기술이 비용을 낮출 수는 있어도, 차별을 자동으로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김경훈은 텅 빈 창구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의 팔십 퍼센트가 무인단말기 이용을 어려워합니다. 시각장애인과 휠체어 이용자는 당연히 직원에게 직접 처리하는 방식을 선호하고요. 디지털 포용법은 대체 수단 제공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합니다. 기술이 장애인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원 한 명, 호출벨 하나, 아날로그 대체 경로 하나 남겨두지 않는다면, 여기서 ‘무인’이라는 단어는 곧 ‘무권리’가 됩니다.”
인간을 남겨두는 설계
박순자 어르신이 휠체어 바퀴를 뒤로 굴리며 체념한 듯 말했다.
“됐심더. 늙고 몬 배운 내 잘못이지. 이따 우리 요양보호사 쌤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달라 캐야겠네.”
그 모습에 최 주무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기술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화려한 AI를 도입하는 데만 급급했지, 그 기술이 누군가에게는 시간 절약이 아니라 새로운 장벽이 될 거란 걸 몰랐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김경훈이 위로하듯 말했다.
“진짜 진보한 사회는 배제를 정교하게 자동화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디지털 권리를 복지의 한 축으로 보고 기기와 유지보수를 지원하는 것. 모든 공공 AI 서비스에 사람을 통한 대체 수단을 의무화하는 것. 그리고 이 시스템을 기획하고 평가할 때 박 어르신이나 저 같은 장애인 당사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것.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진짜 혁신입니다.”
최 주무관은 박 어르신의 휠체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안으로 모셔서 서류 발급 직접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 박사님 자문받아서 대체 수단부터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창구 너머로 사람이 개입하자, 십 분 넘게 멈춰 있던 박 어르신의 민원 서류는 단 이 분 만에 출력되었다.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은 결국,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손길이었다.
주석: 빈곤의 아키텍처
제목: 빈곤의 아키텍처 혹은 차가운 자동화.
AI는 속도를 선물하지만,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의 시간은 앗아간다.
장애인을 데이터 빈곤층으로 남겨둔 채 기술의 혁신을 논하는 것은 기만이다.
진짜 격차는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그 사회가 누구의 몸을 표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는가에 있다.
네 겹의 빈곤에 둘러싸인 박 어르신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똑똑한 음성 인식 AI가 아니라, 눈을 맞추고 서류를 받아 적어줄 창구 직원 한 명이었다.
결론: 진정한 스마트 도시는 기계로 사람을 대체하는 곳이 아니다.
기계가 처리하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해 인간의 자리를 넉넉히 비워두는 공적 설계다.
AI 시대일수록, 포용은 선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다.
그나저나 결혼식이 열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모바일 청첩장을 돌렸더니, 우리 친척 어르신들도 박 어르신처럼 데이터 빈곤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계신다.
내일은 우표를 사서 종이 청첩장을 우체통에 넣고 와야겠다.
아날로그가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