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전성시대.
통신사와 관공서는 이십사 시간 잠들지 않는 인공지능 보이스봇과 화면형 자동응답시스템을 도입하며 혁신을 자랑한다.
효율과 속도라는 깃발 아래, 사람의 온기를 품었던 전화선은 차갑고 매끄러운 알고리즘의 회로로 빠르게 교체되고 있다.
하지만 그 눈부신 자동화는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는가.
또렷한 발음으로 말할 수 있고, 스마트폰 화면을 재빠르게 터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혀가 굳어 발음이 어눌하거나, 시각장애로 화면을 볼 수 없거나, 복잡한 인공지능의 질문을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혁신이라는 이름의 기계는 가장 잔인하고 견고한 차별의 문턱이 된다.
결혼식을 불과 팔일 앞둔 십칠일의 늦은 밤, 사람의 목소리를 찾지 못해 기계 앞에서 절망하던 한 이웃을 만나, 인간을 밀어낸 자동화의 폭력을 해체하고 진정한 연결의 구조를 고민한 씁쓸한 밤의 기록이다.
자정 무렵의 쇳소리
이천이십육년 사월 십칠일 금요일 밤 열한 시 사십오 분.
대구 동구의 신혼집 거실에서 김경훈은 청첩장 명단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보보가 옆에서 봉투에 주소를 적고, 탱고는 하루의 피로를 풀며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때, 현관문 밖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 박사, 김 박사 안에 있능교.
문을 열자 옆집에 사는 칠십대 최만식 어르신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뇌졸중을 앓은 후유증으로 조음 장애, 즉 발음이 어눌해지는 증상을 안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중증 지체장애인으로 밤낮없는 돌봄이 필요한 상태였다.
어르신,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김경훈이 놀라 물었다.
우리 할망구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는데, 허리를 다쳤는지 꼼짝을 몬 해. 긴급 돌봄이나 구급차를 우째 불러야 할지 몰라서 관공서랑 센터에 전화를 걸었는데, 기계가 자꾸 내 말을 몬 알아묵는다 아이가.
최 어르신의 손에는 식은땀으로 젖은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세 번의 기회와 닫힌 문
보보가 황급히 어르신을 거실로 모시고 따뜻한 물을 건넸다.
어르신, 일단 진정하시고요. 119에 바로 전화하시지 그러셨어요.
최 어르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를 걸었지. 근데 내 발음이 새니까, 그 뭐라카노, 인공지능 보이스봇인가 뭔가가 자꾸 지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카면서 똑같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기라. 상담원 연결을 누를라 카이 평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만 사람이 받는다 카고. 눈앞이 캄캄해가 휠체어 타는 우리 할망구 우째 될까 봐 냅다 뛰어올라왔다.
김경훈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 가이드라인을 보면, 인공지능 시스템이 장애인에게 접근 가능하려면 음성뿐만 아니라 키보드나 스위치, 문자 등 복수의 입력 방식을 지원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비정형적 발화를 가진 이용자를 시스템이 정확히 인식해야 하고, 챗봇이 세 번 안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즉시 사람 상담원에게 연결해야 한다고 권고하죠.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업과 관공서는 이십사 시간 운영한다고 광고하지만, 정작 기계가 먼저 전화를 받고 사람은 뒤로 숨어버립니다. 사람을 만나는 건 평일 낮으로 제한되죠. 자동화의 속도가 인간의 접근권을 앞질러 버린 겁니다.
번호 백과사전의 미로
보보가 재빨리 스마트폰을 들어 119에 전화를 걸고, 어르신의 상황을 또렷한 발음으로 대신 전달했다.
구급차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어르신의 거친 숨이 조금 잦아들었다.
어르신, 복지상담센터나 다른 곳도 전화해 보셨어요. 보보가 묻자 어르신이 고개를 저었다.
의사소통 중계는 107이라 카고, 복지 상담은 129라 카고, 행정 민원은 110이라 카는데, 늙고 아픈 사람이 위급할 때 그 번호들을 우째 다 외우고 구분하노.
김경훈이 깊게 탄식했다.
여성 긴급전화 1366이나 청소년 상담 1388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화, 문자, 온라인을 통해 이십사 시간 위기 개입과 상담, 연계가 하나의 창구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 위기에 처하면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지 명확하죠. 하지만 장애인은 장애 유형, 상황 유형, 기관에 따라 서로 다른 번호를 빙빙 돌아야 합니다.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번호 백과사전을 들이미는 꼴이죠.
세계의 설계, 그리고 우리의 과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행정 편의가 아니라 공공 인프라의 문제로 봅니다. 김경훈이 말했다.
호주의 장애인 게이트웨이는 가족과 돌봄 제공자를 위한 별도 전화 창구를 운영하고, 영국은 장애 급여 상담과 응급 상황에 문자 통역과 영상 중계를 즉시 제공하죠. 미국은 988 위기 상담망에 화상전화 이용자와 수어 사용자가 직접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기존 번호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장애를 이해하는 별도의 진입로를 만든 겁니다.
그는 어르신의 손을 꽉 잡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존의 손말이음센터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그걸 포함해서 복지, 행정, 경찰, 소방, 권익옹호기관을 하나로 묶는 전국 단일번호의 장애 관련 통합 상담 전화가 필요합니다. 음성이든, 문자든, 영상 수어든, 보완대체의사소통이든 하나의 번호 안에서 다 지원해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인공지능이 전화를 받더라도, 원하면 언제든 즉시 사람에게 연결되는 구조가 기본값이 되어야 합니다.
구급대원들이 옆집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고, 김경훈과 보보도 어르신을 부축해 함께 내려갔다.
다행히 할머니는 큰 골절 없이 가벼운 타박상만 입은 상태였다.
구급대원들의 친절한 조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세 사람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주석 연결의 아키텍처
제목, 연결의 아키텍처 혹은 사람을 만날 권리.
기계는 피곤을 모르고 이십사 시간 대답하지만, 결코 사람의 불안을 듣지 못한다.
최 어르신의 뭉개진 발음 속에는 죽어가는 아내를 살려야 한다는 가장 절박한 신호가 들어 있었지만, 인공지능은 그것을 오류 데이터로 치부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자동화 시대의 진짜 복지국가는 화려한 인공지능을 내세우는 국가가 아니다.
가장 취약하고 어눌한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언제든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온기와 즉시 연결될 수 있도록 최후의 보루를 남겨두는 국가다.
결론, 소통은 효율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나저나 결혼식이 팔 일 남았다.
손님들호텔 예약 확인을 해야 하는데, 이놈의 호텔도 인공지능 보이스봇이 전화를 받는다. 내일 아침 아홉 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어코 인간 상담원과 통화하고야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