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쓴 검은 보석의 반전 드라마

by 김경훈

우리는 무언가 아주 기본적이고, 때로는 지루하거나 개성 없는 것을 가리켜 '바닐라(Vanilla)'라고 부른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을 차지하는 하얀색 초기값, 혹은 특별한 옵션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지식은 살 안 쪄요 매거진은 이 '순백의 평범함' 속에 숨겨진 검은 유혹과 피땀 어린 역사를 파헤쳐 보려 한다.

바닐라는 사실 결코 하얗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존재다.



나른한 유혹과 주황색 슬라이드 쇼


바닐라 향을 맡으면 마음이 나른해지면서 깊고 달콤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마치 따뜻한 햇살이 드는 조용한 서재에서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는 기분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향기가 사람을 수다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달콤한 간식의 대명사라 그런지, 바닐라 향은 뇌의 제어 장치를 살짝 늦추고 거침없는 자유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건포도나 대추야자 같은 말린 과일의 향기가 느껴지다가, 어느새 오래 묵은 나무와 온실 속 꽃향기, 심지어 말린 담뱃잎 냄새로 변주된다.

눈을 감으면 주황색의 온갖 색조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유쾌한 슬라이드 쇼가 펼쳐진다.

이처럼 풍부한 감각을 선사함에도 불구하고, 바닐라는 오랫동안 다른 주연들을 빛내주는 조연 역할에 만족해왔다.

거의 모든 향미의 뒤를 받쳐주며 배경 속으로 사라지는 '미친 존재감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바닐라는 원래 검은색이다: 블랙 캐비어의 진실


우리는 바닐라를 하얀색이라 믿지만, 이는 거대한 착각이다.

천연 바닐라는 순백과는 거리가 먼 깊고 어두운 검은색이다.

향기의 핵심은 '블랙 캐비어'라고 불리는 검은 바닐라빈 속의 작은 씨앗들에서 나온다.

바닐라는 식용 난초의 일종으로, 멕시코가 고향인 '플라니폴리아'부터 마다가스카르와 타히티를 아우르는 여러 품종이 있다.


바닐라의 역사는 초콜릿의 역사와 샴쌍둥이처럼 얽혀 있다.

중앙아메리카의 토토낙족은 바닐라 재배의 선구자였고, 그들을 지배한 아즈텍족은 바닐라를 '숨어 있는 꽃'이라 불렀다.

바닐라 꽃은 단 몇 시간만 피었다가 금방 시들어버리는 수줍은 성격 때문이었다.

아즈텍인들은 쓴맛이 강한 초콜릿 음료에 바닐라를 섞어 맛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1520년, 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황제 목테수마에게 대접받은 이 '향기로운 음료'가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바닐라의 세계 정복이 시작되었다.



열두 살 소년 노예가 발견한 손가락의 기적


바닐라는 지독하게 까다로운 농산물이다.

심어서 꽃을 보기까지 3년이 걸리고, 핀 꽃은 반나절도 안 되어 시든다.

자연 상태에서는 특정 벌이나 곤충만이 가루받이를 해줄 수 있는데, 이 곤충들은 아메리카 대륙에만 살았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식민지에 바닐라를 심고도 열매를 맺지 못해 애를 태웠다.


이 난제를 해결한 주인공은 마다가스카르 인근 레위니옹 섬에 살던 열두 살 소년 노예 에드몽 알비우스였다.

1841년, 소년은 아주 가는 막대나 손톱을 이용해 수동으로 꽃가루를 옮기는 '손가락 가루받이(Hand Pollination)'법을 발견했다.

이 천재적인 발견 덕분에 바닐라는 전 지구적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달콤한 바닐라 향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에드몽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하얗다'는 뜻의 알비우스라는 성을 얻었지만, 자신의 위대한 발견으로 단 한 푼의 금전적 이득도 얻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즐기는 달콤한 향기 뒤에는 이름 없는 소년의 쓸쓸한 뒷모습이 숨어 있는 셈이다.



토머스 제퍼슨과 '화이트 향미'의 탄생


검은 바닐라가 '하얀 평범함'의 대명사가 된 데에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역할이 컸다.

프랑스 식도락 문화에 심취했던 그는 프랑스에서 바닐라빈 50개를 공수해왔다.

당시 다른 아이스크림들이 과일과 견과류를 잔뜩 넣어 복잡한 맛을 낼 때, 제퍼슨은 우유와 설탕, 그리고 바닐라 캐비어만 넣은 극도로 미니멀한 아이스크림을 선보였다.


이 '노란빛 도는 흰색' 아이스크림은 상류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바닐라는 모든 향미의 출발점이자 기본값으로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바닐라가 아이스크림 본연의 잡내를 잡아주면서도 우아한 향을 내는 마법 같은 효과에 열광했다.

이때부터 바닐라는 개성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순백의 배경'이 되었다.



삼차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완벽한 평화주의자


바닐라가 전 세계적으로 호불호 없는 사랑을 받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바닐라 향은 얼굴과 코의 감각을 담당하는 '삼차신경'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 특이한 냄새다.

우리가 어떤 강한 향수나 음식 냄새를 맡고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냄새 자체가 아니라 삼차신경의 거부 반응 때문인데, 바닐라는 이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이런 특징 덕분에 바닐라는 스트레스성 두통을 완화하고, 폐쇄 공포증을 유발하는 MRI 검사 시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의료적 효과까지 발휘한다.

아로마 테라피스트들은 바닐라가 남성의 성기능 회복과 수면 장애 완화에도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바닐라는 그야말로 공격성이라곤 전혀 없는, 인류를 향한 가장 다정한 위로의 향기인 것이다.



순백성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현대 사회에서 바닐라는 때로 '지루함'이나 '주류 문화의 무색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초콜릿(유색성)과 대비되는 바닐라(순백성)는 오랫동안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초기값'으로서의 바닐라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바닐라는 더 이상 제로(0)가 아니다.

멕시코산 바닐라에서는 묵직한 삼나무 향이 나고, 마다가스카르산에서는 몽롱하고 보드라운 분내가 나며, 타히티산에서는 화사한 꽃향기가 난다.

지역마다, 생산자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는 이 검은 콩꼬투리들은 이제 배경의 그늘을 벗어나 당당히 무대의 중앙으로 올라오고 있다.



마무리하며: 지식은 살 안 쪄요


평범함이란 어쩌면 가장 완벽하게 조율된 비범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에는 열두 살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기적과, 대륙을 건너온 탐험가들의 야망, 그리고 뇌 신경마저 평온하게 만드는 화학적 신비가 농축되어 있다.


지식은 아무리 섭취해도 혈당을 올리지 않으며, 오히려 당신의 미각을 더욱 섬세하게 연마해 줄 것이다.

오늘 바닐라 향을 맡게 된다면, 그것을 단순한 '기본값'이라 부르지 말라.

그것은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온 검은 난초의 고결한 영혼이자, 인류가 찾아낸 가장 완벽한 평화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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