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하기, 라면 끓이기, 미역국과 된장국까지는 어찌어찌 정복했다.
하지만 진정한 한식의 에베레스트는 따로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지글지글 ‘삼겹살’이다.
불판 위의 뜨거운 용암, 사방으로 튀는 기름 지뢰밭.
도저히 익었는지 탔는지 구별할 수 없는 이 요리는 시각장애인에게는 넘을 수 없는 히말라야 산맥과도 같았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위대한 도전을 위해, 특별 연구팀이 꾸려졌다.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인 연구원 본인, 그리고 시각 정보 분석 및 위험 관리를 담당하는 수석 연구원 ‘보보’.
마지막으로, 연구 결과물의 품질 관리를 책임질 연구윤리위원장 겸 최종 시식단인 ‘탱고’. 우리의 원대한 연구 목표는 다음과 같다.
‘시각 정보 없이 오직 남은 감각만으로 삼겹살을 완벽하게 구워낼 수 있는가?’
첫 번째 가설은 ‘소리’였다.
고기가 익으면 지글거리는 소리가 바뀔 것이라는 음향학적(Acoustic) 접근. 결과는? 참담한 실패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이익’ 하는 아름다운 교향곡만 들릴 뿐, ‘다 익었습니다’ 하는 결정적 아리아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연구윤리위원장 탱고는 기대감에 찬 콧구멍만 벌름거릴 뿐이었다.
두 번째 가설은 ‘냄새’였다.
고소한 냄새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바로 고기가 다 익은 순간이라는 후각적(Olfactory) 접근.
이 또한 실패다.
굽기 시작한 지 30초 만에 온 집안에 행복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어느 장단에 맞춰 뒤집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간 맛있는 냄새와 함께 까만 숯덩이를 얻을 뻔했다.
세 번째 가설은 ‘시간’이었다.
한쪽 면 당 정확히 90초씩 굽는다는 계량적(Quantitative) 접근.
이전보다는 나았지만, 고기의 두께나 불판의 온도라는 변수를 통제하지 못해 어떤 놈은 설익고 어떤 놈은 너무 익는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그때, 수석 연구원 보보가 결정적 아이디어를 냈다.
“만져보면 어때?”
그렇다. 집게로 고기의 표면을 살짝 눌러보는 촉각적(Haptic) 접근.
날고기는 흐물거리지만, 잘 익은 고기는 탄력이 있다.
바로 이것이었다!
소리로 굽기 시작을 알리고, 시간으로 대략적인 타이밍을 잰 뒤, 집게 끝의 감각으로 익었는지 여부를 최종 확인하는 복합적인 감각 대체(Sensory Substitution) 방법론!
이것은 단순히 요리법의 발견이 아니다.
한 사람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참여적 디자인(Participatory Design)의 위대한 승리다.
보보의 시각적 피드백과 나의 비시각적 감각이 협력하여,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 낸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공동 연구자이다.
마침내, 모든 휴리스틱(Heuristics)을 동원해 구워낸 첫 삼겹살을 입에 넣는 순간, 연구팀 전원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물론 윤리위원장 탱고는 ‘한 점만 달라’는 격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지글거리는 소리, 고소한 냄새, 그리고 입안에서 터지는 완벽한 식감.
이것은 그냥 삼겹살이 아니었다.
한계에 도전하고, 협력하고, 마침내 성취해 낸 인간 승리의 맛이었다.
삼겹살을 정복했으니, 이제 남은 건 숯불 닭갈비다.
보보 연구원과 탱고 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다면, 세상에 불가능한 요리는 없으리라 확신한다.
비하인드 스토리
성공의 기쁨에 취해 수석 연구원 보보에게 물었다.
“어때, 이제 나 혼자서도 완벽하게 구울 수 있겠지?”
보보가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응, 고기는 정말 좋았어. 그런데 자기가 입고 있던 그 하얀 티셔츠 앞면은… 삼겹살 기름으로 지도를 그렸더라.”
결국, 연구 방법론에 ‘앞치마 착용 의무화’라는 조항이 새롭게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