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가 유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의 남편, 즉 아는 형님이 서울 강남에서 일식집을 하신다.
그곳의 냉우동이 사무치게 그립다.
대구의 수많은 일식집을 다녀봤지만, 솔직히 말해 마트에서 파는 ‘생생우동’ 면발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집 냉우동은 다르다.
차원이 다른 존재다.
요즘 ‘손짜장’, ‘손칼국수’를 내건 집은 많지만, 막상 먹어보면 기계로 뽑은 면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집 우동은 확실히 다르다.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면발이 혀 위에서 춤을 춘다.
쫄깃함을 넘어, 탱탱하고, 탱고를 추고, 탱고탱고하다.
이 식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중의 면으로는 비교 대상이 없고, 굳이 찾자면 ‘분모자’의 그 밀도 높은 쫄깃함과 그나마 비슷하다.
이것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다.
‘식감’은 음식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데이터(Data)이다.
눈으로 면의 때깔을 볼 수 없기에, 오직 혀와 치아, 입술을 통해 전달되는 촉각적 경험(Haptic Experience)만으로 그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그 집 면발은 눈을 감고도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완벽한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체험을 선사한다.
하루 종일 수타로 면을 뽑아내는 형님의 관절은 아마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고된 노동 속에, 일본의 미학인 와비사비(侘寂), 즉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획일적인 완벽함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빚어내는 미세한 불균일함과 살아있는 질감.
그것이 바로 이 냉우동의 영혼이다.
대구에서 냉우동을 먹을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서울 강남의 그 집과 처절한 비교 분석이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같다.
‘아, 서울 가고 싶다.’
그 탱고 추는 면발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비하인드 스토리
그 ‘탱고탱고한’ 식감을 잊지 못해, 보보와 함께 집에서 수타 우동에 도전했다.
‘와비사비의 정신’을 되새기며, 밀가루 반죽을 온 힘을 다해 치댔다.
결과는? 주방은 밀가루 지옥으로 변했고, 우리의 손에서 태어난 것은 우동 면발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밀떡이었다.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진짜 탱고는 ‘내 이름으로 지금 뭘 하는 건가’ 하는 한심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렇다.
때로는 위대한 예술을 감상하는 것과 직접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