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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딸, 심리학의 복잡한 사춘기

by 김경훈

철학은 흔히 ‘사유 학문의 정점’이라 불린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오롯이 이성과 논리만으로 인간과 세계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작업.

그 고요한 사유의 우주에서, 어느 날 ‘마음’이라는 별에 유독 강한 끌림을 느낀 자식이 태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심리학이다.

철학이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는 동안, 심리학은 “그 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는 야심만만한 물음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섰다.


계몽시대의 과학적 열풍은 심리학에게 더 이상 철학이라는 안락한 집에 머물러 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심리학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다.

이에 등장한 것이 ‘정신물리학’이다.

빛의 강도에 따라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실험하고, 사람의 반응 시간을 측정하며 마음을 수치화하려는 시도.

그것은 정신의 작용을 물리적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 첫 출발점이었다.

마음의 무게를 재고, 생각의 속도를 측정하려는 이 열정은 감동적이지만 어딘가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 순간부터 심리학은 철학의 질문을 지닌 채 과학의 언어로 대답하려는 이중적 숙명을 안게 된다.


그렇기에 심리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갈등을 겪는다.

어떤 대학에서는 자연과학의 실험복을 입고, 또 다른 대학에서는 인문학의 사색을 이어가며, 사회과학의 통계 도구를 손에 쥐고 있다.

이는 단지 학문적 범위가 넓기 때문만은 아니다.

심리학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접근법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파를 측정하고 호르몬을 분석하는 생리심리학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삶의 이야기와 그 내면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현상학적 심리학이 있다.

한쪽은 실험실에서 숫자를 다루고, 다른 한쪽은 상담실에서 눈빛과 침묵을 해석한다.

심리학은 이처럼 두 개의 전혀 다른 언어를 동시에 말하는 기묘한 복면가왕과도 같다.


현대에 이르러 심리학은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과학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칫 심리학이 뇌를 연구하는 한 분야로 환원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 경험을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는 언제나 결핍을 안고 있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대신 청각과 촉각, 기억의 지도만으로 길을 찾는 사람의 삶을 뇌 영상 하나로 포착할 수 있을까.

신경세포의 활성화는 측정할 수 있지만, 그 활성화가 일으키는 감정의 결, 의미의 깊이, 혹은 한 인간의 고유한 세계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하드웨어를 분석하며 소프트웨어의 감각을 이해하려는 범주 오류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심리학의 매력은 더욱 선명해진다.

과학이 되려는 열망과 과학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인간 마음의 신비 사이에서, 심리학은 끊임없이 줄타기를 한다.

뇌라는 악기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그 악기에서 울려 퍼지는 삶의 선율을 설명할 수 없다.

심리학은 그 구조와 연주를 동시에 이해하고자 하는 드문 학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은 여전히 철학이라는 어머니의 오래된 질문에 답하려 애쓴다.

마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그토록 복잡하게 아프고, 웃고, 갈등하는가.

이러한 물음을 과학의 언어로 말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인간적 진실을 포착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심리학을 독특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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