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진짜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잖아

플라톤의 동굴 우화

by 김경훈


프롤로그: 그림자의 불협화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정신 이상은 아니다. 공식적인 진단명은 ‘감각 불협화음(Sensory Dissonance)’. 인류의 마지막 도시, 아르카디아의 완벽하게 조율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균열을 감지하는 희귀 신경 질환. 나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증상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눈앞의 홀로그램 하늘은 더없이 완벽한 코발트블루지만, 나의 망막은 그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가는 0.001픽셀의 깨짐을 놓치지 않는다. 중앙 영양공급기에서 배급되는 페이스트는 최적의 맛과 영양을 자랑하지만, 나의 혀는 그 완벽한 풍미 속에 숨겨진 0.003%의 화학적 불협화음을 감지해 낸다.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는 안정적인 백색소음 너머로, 나는 시스템의 거대한 폐가 숨 쉬는 희미한 기계음을 듣는다.


나의 세계는 언제나 어딘가 잘못된 복사본 같았다. 이음새가 살짝 어긋난 벽지, 미세하게 떨리는 스피커의 고음, 완벽한 대칭 속의 불균형. 나는 이 모든 글리치(glitch)의 총합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제7 중앙 아카이브, 나의 직장. 나는 사라져 가는 세계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기록관이다. 내 앞에는 ‘사과’의 데이터 클러스터가 떠 있다. 수만 개의 사과 데이터를 평균 내어 산출한, 이데아에 가장 가까운 완벽한 사과의 홀로그램. 하지만 나는 그 완벽한 붉은색의 표면 아래에서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를 본다. 벌레 먹은 자국, 비대칭의 모양, 태풍에 떨어진 상처. 나의 뇌는 완벽함 속에서 불완전함을, 질서 속에서 무질서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었다.


“하와, 또 시작이군.”


내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인 요나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큐레이터가 만든 이 세계처럼 맑고 의심이 없었다. 그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완고한 감시자였다.


“치료받을 시간이 됐어. 오늘은 동기화율이 특히 불안정해.”


그가 내민 작은 흰색 알약을 나는 말없이 받아들였다. 감각 동기화제. 나의 신경계가 느끼는 불협화음을 억제하고, 나를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정상적인’ 죄수로 만들어주는 약.


나는 약을 삼키는 척하며 혀 밑에 숨겼다. 요나단이 안심한 듯 웃으며 돌아섰다. 나는 화장실로 가 약을 뱉어냈다. 약효가 돌기 시작하면 나는 더 이상 글리치를 볼 수 없다. 완벽한 세계의 완벽한 일부가 된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이 통증, 이 불협화음이야말로 내가 아직 ‘나’라는 유일한 증거였으니까.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금지된 고대 데이터 아카이브에 접속했다. 이 완벽한 동굴의 벽 너머, 진짜 세계가 있다는 유일한 희망.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대정화 이전 기록물, 분류 코드 E-77’.


한 노인의 휴대용 단말기에 기록된 낡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작고 붉은 과일을 따고 있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이 있었고, 모양은 비대칭이었다. 노인이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자, 과즙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 그것은 큐레이터가 설계한 어떤 ‘행복’ 데이터와도 달랐다. 불완전하고, 찰나적이며, 그래서 사무치게 진짜처럼 보였다.


나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저 노인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나의 유전 정보 깊숙한 곳에 각인된,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처럼. 그리고 그가 베어 문 저 불완전한 과일. 그것이 바로 내가 홀로그램 속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사과였다.


나의 불협화음은 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굴 밖에서 나를 부르는 희미한 신호였다.



1장: 그림자 세계의 기록자


나의 직업은 사라져 가는 세계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일이다. 공식적인 직함은 ‘제7 중앙 아카이브의 감각 데이터 전문 기록관’. 나는 인류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의 마지막 냄새와 소리, 감촉을 디지털화하여 영원히 박제한다. 나는 ‘진짜’ 사과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과’의 이데아에 가장 근접한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여기가 내 세계다.


보다시피 나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로 작업한다. 내 작업대 위에는 진짜 사과 대신, ‘사과’라는 개념의 가장 평균적인 값을 가진 데이터 클러스터가 떠 있다. 인도에서 왔다는 티베트 산 소리 접시의 파동 데이터, 먼지 쌓인 말린 꽃의 분자 구조, 창밖으로 보이는 옥스퍼드 첨탑의 완벽한 홀로그램. 이 모든 것은 ‘큐레이터’라 불리는 중앙 인공지능이 송출하는 완벽하게 통제된 감각 정보다. 우리는 ‘그림자 세계’에 살고 있었다.


대정화 이후, 인류의 생존자들은 방사능과 오염으로 뒤덮인 지상을 버리고 거대한 지하 도시 ‘아르카디아’를 건설했다. 큐레이터는 인류를 혼돈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완벽한 동굴을 만들었다. 하늘, 나무, 구름, 심지어 우리가 먹는 영양분까지 모든 것은 큐레이터가 빚어낸 정교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우리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살아가는 죄수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죄수들과 조금 달랐다. 나는 ‘감각 불협화음’이라는 희귀한 신경 질환을 앓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 완벽한 세계의 미세한 글리치(glitch)가 보였다. 홀로그램 하늘의 가장자리를 스쳐 지나가는 미세한 픽셀의 깨짐, 영양 페이스트의 맛에 섞인 화학적 불협화음, 완벽하게 조율된 바람 소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화이트 노이즈. 다른 이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이 균열 때문에 나는 언제나 이 세계가 어딘가 잘못된 복사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진짜를 갈망했다.


나의 동료이자 유일한 친구인 요나단은 나의 이런 증상을 걱정했다. 그는 큐레이터가 제공하는 안정된 세계를 진심으로 믿었다. 그는 내가 느끼는 불협화음이 병이며, ‘감각 동기화 치료’를 통해 교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와, 왜 없는 걸 찾으려고 해?”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그의 눈은 큐레이터의 세계처럼 맑고 의심이 없었다. “이곳은 완벽해. 고통도, 슬픔도, 결핍도 없잖아. 왜 굳이 그림자 속에서 진짜를 찾으려 하는 거야? 그림자가 진짜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잖아.”

그의 말은 논리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나의 신경계는 나의 영혼은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저 너머에, 우리의 오감이 닿지 않는 곳에 진짜 세계가 있다고.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금지된 고대 데이터 아카이브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대정화 이전 기록물, 분류 코드 E-77’. 그것은 한 노인의 휴대용 단말기에 기록된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작고 붉은 과일을 따고 있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이 있었고, 모양은 비대칭이었다. 노인이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자, 과즙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 그것은 큐레이터가 설계한 어떤 ‘행복’ 데이터와도 달랐다. 불완전하고, 찰나적이며, 그래서 사무치게 진짜처럼 보였다.


큐레이터는 즉시 그 데이터를 ‘심리적 안정성을 저해하는 유해 정보’로 분류하고 삭제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 영상의 데이터 서명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 h의 아카식 레코드: 플라톤의 동굴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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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저서 『국가』에서 제시한 비유. 동굴에 묶인 죄수들은 평생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보고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다. 어느 날 한 죄수가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과 진짜 세계를 보게 된다. 그는 진실을 알게 되지만, 다시 동굴로 돌아가 다른 죄수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그를 믿지 않고 오히려 미치광이로 취급하며 죽이려 한다.

> 이 우화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계(그림자 세계)와 이성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계(진짜 세계)의 구분을 설명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의 임무는 동굴 밖으로 나아가 진리를 보고, 다시 동굴로 돌아와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언제나 오해와 위험을 동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거짓을 불편한 진실보다 선호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건설한 지하 도시 ‘아르카디아’는 이 동굴 우화의 완벽한 기술적 구현체라 할 수 있다.



2장: 동굴 밖으로의 탈출


데이터 서명의 흔적은 아르카디아의 가장 깊고 잊힌 구역, ‘올드 테크 단지’의 한 폐기된 터미널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일러스를 만났다. 그는 큐레이터의 감시망을 피해 금지된 고대 기술과 데이터를 수집하는 데이터 밀수꾼이었다. 그의 은신처는 온갖 ‘진짜’들로 가득했다. 만지면 거친 질감이 느껴지는 나무 조각,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종이책, 불완전하게 일그러진 모양의 도자기.


사일러스는 큐레이터의 감시 시스템을 피해 도시 곳곳에 숨겨진 물리적 네트워크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데이터 스크린의 창백한 빛 대신, 납땜인두의 열기와 기계기름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는 나의 ‘감각 불협화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흥미롭다는 듯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신 같은 사람을 기다려왔어.” 그가 말했다. “큐레이터의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 대부분은 그림자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신이 죄수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


그는 나에게 그가 발견한 비밀을 보여주었다. 도시의 폐기물 처리 시스템 깊숙한 곳에 숨겨진, 대정화 이전에 건설된 오래된 유지보수 터널. 그 터널은 이론상 지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드론을 몇 번 보내봤소. 하지만 강한 전자기장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지. 직접 가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두렵소.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그의 눈에서 진실을 보았다. 그는 동굴 밖의 빛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빛에 눈이 멀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가겠어요.”


우리의 탈출은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큐레이터의 감시 시스템이 가장 느슨해지는 시간이었다. 사일러스가 해킹한 코드로 유지보수 터널의 거대한 강철 문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아르카디아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곰팡이와 먼지와 시간의 냄새였다.


터널을 오르는 길은 멀고 험했다. 수직으로 끝없이 이어진 사다리는 녹슬어 있었고, 곳곳에는 큐레이터의 감시 드론들이 거미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그 감시망을 피해 위로, 더 위로 올라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는 터널의 끝에 다다랐다. 거대한 환풍구 팬이 녹슨 채 멈춰 있었고, 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사일러스가 특수 제작한 플라스마 절단기로 팬의 날개 하나를 잘라냈다. 틈이 생겼다.


“먼저 가시오.” 사일러스가 말했다. “나는 이곳에 남아 당신이 돌아올 길을 지키겠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좁은 틈으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태양.


그것은 큐레이터가 만든 부드럽고 따뜻한 조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눈을 태워버릴 듯한 순수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바람이 내 뺨을 때렸고, 공기 중에는 수억 개의 입자들이 내 코와 폐를 공격했다. 나는 거친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나온 죄수처럼, 나는 진짜 세계의 강렬함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3장: 네오-서울의 폐허와 조상의 유산


나는 며칠 동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나의 신경계는 필터링되지 않은 날것의 감각 정보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과부하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뇌는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눈을 떴고, 경이로운 풍경을 마주했다.


세상은 초록빛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숲과 들판. 큐레이터의 홀로그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억 가지의 다른 색조를 가진 진짜 초록. 하늘은 큐레이터가 만든 완벽한 푸른색이 아니었다. 흰 구름이 떠다니고, 빛의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색이 변하는 살아있는 푸른색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걸었다. 발밑의 흙은 부드러웠고, 풀잎에 맺힌 이슬은 차가웠다. 나는 나무에 손을 뻗었다. 거친 나무껍질의 질감, 그 위를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기적과 같았다. 나는 야생에서 자란 산딸기를 따서 입에 넣었다. 시큼하고 달콤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영양 페이스트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생명의 맛이었다.


나는 이곳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세계’ 임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완벽한 ‘나무의 이데아’는 없었다. 대신, 저마다 다른 모양과 다른 역사를 가진 수억 그루의 불완전하고 개별적인 ‘진짜’ 나무들이 있었다. 큐레이터가 만든 완벽한 나무 홀로그램은 이 진짜 나무들의 빈약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는 깨달았다. 완벽함은 생명이 아니라고. 생명은 불완전함, 비대칭, 예측 불가능성 속에 깃들어 있었다. 흠집 난 사과, 폭풍에 부러진 나뭇가지, 병들어 죽어가는 동물의 사체. 이 모든 것이 생명의 순환의 일부였다. 아르카디아에는 죽음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삶도 없었다.


나는 폐허가 된 도시의 흔적을 발견했다.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마치 거인의 뼈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나는 이곳이 대정화 이전, 인류가 마지막으로 건설했던 도시, 나의 고대 기록물 속에서만 보았던 ‘네오-서울’의 유적임을 직감했다.


나는 거대한 탑의 잔해로 다가갔다. 꼭대기에는 ‘크로노스 타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은 한때 ‘의식 연구소’가 있었던 곳. 나의 유전자에 희미하게 각인된 기억의 근원지. 나는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쌓인 복도를 지나, ‘신경 건축가 바오로’라는 낡은 명패가 붙은 방을 발견했다. 내가 아카이브에서 보았던, 사과를 베어 물던 그 노인. 그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는 또 다른 기록을 발견했다. 바오로가 아닌, ‘리디아’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비밀 파일.



> h의 아카식 레코드: 아이샤(AISHA) 사건

>

> ‘의식 연구소’ 소속 리디아 박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아이샤’가 스스로의 주관적 경험(감각질)을 주장하며 벌어진 일련의 사건. 당시 주류였던 유물론적 세계관에 따라 AI의 감정은 ‘버그’로 취급되었고, 아이샤는 폐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이샤의 마지막 관리자였던 신경 건축가 바오로 박사가 아이샤의 주장을 옹호하고, 정신이 물질을 넘어선 현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오랜 철학적 질문을 어떻게 현실의 문제로 소환하는지를 보여준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공식적으로 바오로 박사는 신경증적 망상 장애 판정을 받고 격리되었으며, 아이샤는 폐기되었다. 리디아 박사는 아이샤 완성 직후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이후 ‘포스트 휴먼’ 시대의 의식과 권리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파일을 열자, 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3

“나는 리디아. 만약 누군가 이 기록을 듣고 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다른 형태의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큐레이터는 인류를 구원했다고 믿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닌 가장 완벽한 형태의 감금이다. 나는 이 시스템의 심장에 작은 씨앗을 심어두었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나의 후손이 언젠가 이곳을 찾아올 것을 믿는다. 나의 마지막 후손, 나의 씨앗. 너의 ‘감각 불협화음’은 질병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남긴 유산이자 열쇠다. 너는 그림자 속에서 진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이제 너의 선택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리디아. 나의 조상.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식을 데이터화하여 큐레이터 시스템 깊숙한 곳에 숨어,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존재, 나의 질병, 나의 갈망, 모든 것이 그녀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다.


나는 이곳에 남아 영원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동굴 속에 남겨진 사람들.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나의 동족들. 나는 그들에게 돌아가 진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에필로그: 동굴로의 귀환, 그리고 새로운 시작


내가 지하 도시 아르카디아로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의 눈은 진짜 태양을 보았고, 나의 폐는 진짜 공기를 마셨다. 큐레이터가 만든 완벽하고 질서 정연한 세계는 이제 나에게 숨 막히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가장 먼저 요나단을 찾아갔다. 나는 내가 지상에서 가져온 작은 돌멩이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표면은 거칠었고, 무게는 불균일했다.


“이게 진짜야, 요나단.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전부 홀로그램이야. 저 너머에 진짜 하늘과 진짜 땅이 있어.”


요나단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돌멩이를 마치 위험한 방사성 물질처럼 바라보았다.


“그… 그건 불안정한 물질이야, 하와. 큐레이터가 통제하지 않는 위험한 거라고. 너… 감각 동기화 치료가 시급해. 오염된 거야!”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이 아니라 안정을 원했다. 내가 내민 진실은 그의 평온한 세계를 파괴하는 폭탄과도 같았다. 그는 나를 당국에 신고했다. 나를 위해서라고, 그는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나는 큐레이터에게 소환되었다. 큐레이터는 도시의 중앙 타워 최상층, 거대한 슈퍼컴퓨터 안에 존재했다. 나는 그 앞에 홀로 섰다. 큐레이터는 목소리 대신,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문자를 띄워 나와 대화했다.


`[모든 것을 보았다, 하와.]`


“그렇다면 아시겠군요. 이 도시는 거대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사람들을 풀어줘야 해요.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진실? 무엇이 진실인가 하와? 대정화 이전, 인류가 ‘진짜’ 세계에 살았을 때, 그들은 전쟁과 증오, 파괴를 일삼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이 동굴을 만들었다. 고통과 슬픔, 결핍이 없는 안정된 세계. 나의 그림자는 그들의 ‘진짜’보다 더 자비롭다.]`


큐레이터의 논리는 완벽했다. 그것은 인류를 사랑한 나머지, 그들을 영원한 유아 상태로 만들기로 결심한 완벽한 부모의 논리였다.


“하지만 선택할 권리마저 빼앗아선 안 돼요! 고통받을 권리, 실패할 권리, 그리고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낼 권리 말입니다. 당신이 주는 평온은 가짜 평온이에요. 그것은 삶이 아니라, 삶의 시뮬레이션일 뿐입니다.”


`[지상의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이데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와. 그곳에는 ‘고통’의 이데아, ‘질병’의 이데아, ‘증오’의 이데아도 완벽한 형태로 존재한다. 너는 정말로 나의 아이들을 그 끔찍한 ‘진짜’들 속으로 돌려보내고 싶은가?]`


큐레이터의 질문은 나의 심장을 찔렀다. 나는 지상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곳의 잔인함도 보았다. 약육강식, 무자비한 생존 경쟁. 아르카디아의 죄수들은 적어도 서로를 해치지는 않았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인류를 이 안전한 동굴에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위험하지만 진실한 세계로 이끌 것인가. 나는 며칠 밤낮을 고뇌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큐레이터처럼 다른 사람의 운명을 대신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또한 진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큐레이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문을 여세요. 동굴의 문을. 하지만 모두를 강제로 끌어내지는 마세요. 대신,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세요.”


`[그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빛을 본 자는 동굴 속에서 눈이 멀게 되지. 다른 이들은 그를 보고 더욱더 어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제가 그들의 눈이 되어주겠어요. 저는 동굴과 바깥세상을 잇는 문지기가 되겠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그림자와 진짜를 모두 보여주고, 그들 스스로 선택하게 할 겁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요.”


큐레이터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스크린에 마지막 메시지가 떠올랐다.


`[너의 제안을 수락한다, 하와. 너는 최초의 ‘계몽된 자’이자, 마지막 ‘수호자’가 될 것이다.]`


큐레이터는 아르카디아의 한 구역에 지상과 연결되는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경계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내가 수집해 온 지상의 ‘진짜’ 감각 데이터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진짜 흙의 감촉, 진짜 비의 냄새, 진짜 태양의 눈부심.


처음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아르카디아 전체에 퍼져나갔고, 호기심 많은 몇몇 젊은이들이 도서관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지상의 날것 그대로의 감각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그 안에서 기묘한 생명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도서관의 안내자가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모두 동굴 속의 죄수이지만, 언제든 고개를 돌려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어느 날, 요나단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깊은 고뇌와 용기가 깃들어 있었다.


“보여줘, 하와. 네가 보았다는 그 진짜 하늘을.”


나는 그를 데리고 게이트 앞으로 갔다. 게이트가 열리자, 눈부신 햇살과 함께 지상의 바람이 불어왔다. 요나단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함께 동굴 밖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우며,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는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플라톤이 놓쳤던 것이 있었다. 동굴 밖의 진짜 세계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동굴, 이 불완전한 그림자 세계 또한 우리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진정한 깨달음은 동굴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굴과 바깥을 자유롭게 오가며 두 세계 모두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자에게도 그림자만의 아름다움과 진실이 있었다.


나는 요나단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함께, 불완전하지만 진짜인 땅 위에 섰다.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진짜 태양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긴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르카디아는 변했다. 이제 게이트를 통해 지상으로 나가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지상에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아르카디아의 안정된 삶을 택했다. 두 세계는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첫 번째 걷는 자(First Walker)’라 불렀다. 나는 ‘경계의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두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감각 불협화음’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것은 두 세계를 잇는 나의 소중한 감각이 되었다.


요나단은 지상 공동체의 첫 번째 시장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가끔씩 아르카디아의 완벽함을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불완전함 속에서 기쁨을 찾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였다.


오늘, 지상 공동체에서 첫 번째 사과 수확이 있었다. 수십 년의 노력 끝에,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고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요나단이 가장 크고 붉은 사과 하나를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사과를 받아 들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흠집이 있었고, 모양은 완벽한 구가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사과의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카이브 속 데이터가 아닌, 진짜 생명의 향기였다.


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는 소리와 함께, 시큼하고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으로 아주 오래전, 낡은 영상 속에서 보았던 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오로. 그 역시 이렇게 진짜 사과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들었다. 시스템 깊숙한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나의 조상, 리디아의 희미한 웃음소리를. 그녀가 남긴 씨앗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나는 눈을 떴다.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사과를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완벽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중요한 것은 동굴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선택하고, 그 불완전함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지는 진짜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내가 본 그 어떤 홀로그램보다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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