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단종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듣던 어느 가수의 음악 녹음테이프가 있었다.
약간의 잡음과 늘어지는 소리, 그 아날로그적 불완전함 속에 담긴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따스하고 깊었다.
세월이 흘러 그 테이프는 망가졌고, 깨끗하게 디지털로 복원된 음원 파일을 구했다.
소리는 한없이 선명해졌지만, 테이프가 돌아가며 만들어내던 그 미묘한 ‘온기’와 ‘질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음향 효과를 만져봐도 그 시절의 느낌은 재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라진 원본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이었다.
이 낡은 녹음테이프에 대한 애틋함은 향료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전설, ‘마이소르 샌달우드(Mysore Sandalwood)’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백단향(白檀香)이라고도 불리는 샌달우드는 수천 년간 인류를 매혹시켜 온 향기이다.
하지만 그 성장은 지독히 까다롭다.
다른 식물의 양분에 기생해야만 자라고, 암수가 따로 있어 번식도 어려우며, 향기로운 오일을 품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품질로 꼽히던 것은 단연 인도 마이소르 지방에서 자란, ‘노산(老山) 백 단’이라 불리던 샌달우드였다.
그 향은 단순히 나무 냄새가 아니라, 마치 버터나 크림처럼 부드럽고 기름진, 관능적이기까지 한 독보적인 깊이를 가졌다.
하지만 서구 향수 산업의 수요가 폭발하면서 비극은 예고된 수순처럼 찾아왔다.
너도나도 뿌리까지 뽑아가는 무분별한 벌채 끝에, 마이소르 샌달우드는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공유 자원이 결국 고갈되고 만다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결국 인도 정부는 거래를 전면 금지했고, 마이소르 샌달우드는 상업적으로 국소 절멸(extirpation)되어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향수 산업은 필사적으로 대안을 찾아 나섰다.
호주에서 자라는 종은 같지만 향은 다른 샌달우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신산(新山) 백 단’이라 불리는 호주산은 마이소르의 그윽한 크림 향 대신, 나무와 풀의 느낌이 더 강한 상쾌함을 가졌다.
결국 조향사들은 호주산 샌달우드에 여러 합성 향료를 더해, 사라진 마이소르의 향을 재현하려 애쓰고 있다.
이는 마치 디지털 음원에 필터를 덧씌워 아날로그의 감성을 흉내 내보려는 시도와 같다.
향의 가치를 결정하는 프로비넌스(Provenance, 출처)의 중요성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다.
이 지점에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혼톨로지(Hauntology)’라는 개념을 빌려올 수 있다.
이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유령의 존재론을 말한다.
오늘날의 샌달우드 향수는 바로 이 ‘마이소르의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새로운 샌달우드 향수는 존재하지 않는 원본을 향한 끝없는 모방이자 그리움의 표현인 셈이다.
향의 ‘질감’과 ‘온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가 된다.
마이소르 샌달우드의 ‘버터 같은’ 질감은 이제 상상 속에서나 만져볼 수 있는 감각이 되었다.
이 사라진 감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향기를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하나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자연이 주는 선물을 책임감 있게, 그리고 지속 가능하게 향유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이소르 샌달우드의 유령은 단순히 향기로운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책임한 욕망이 남긴 뼈아픈 결과물이다.
우리가 지금 즐기는 수많은 편리함과 아름다움의 이면에도, 또 다른 사라져 가는 ‘원본’의 비명이 숨어있지는 않은지 성찰하게 된다.
더 이상 미래 세대가 그리워해야 할 유령을 만들지 않아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