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by 김경훈

차를 타고 오던 중, 철학 박사 보보가 우주적 진실에 맞먹는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자기야, 민달팽이는 징그러운데, 집 있는 달팽이는 왜 괜찮지?” 순간, 차 안의 공기가 멈췄다.

그렇다.

왜 우리는 등딱지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로, 한 생명체를 ‘캐릭터 상품’과 ‘혐오 생물’ 사이에서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르게 대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지극히 기호학적(Semiotic)인 문제다.

달팽이의 등딱지, 즉 껍질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무해하고, 안정적인 집을 소유한, 나름의 질서를 가진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기표(Signifier)다.

우리는 그 껍데기를 보고 ‘안전’, ‘귀여움’, 심지어는 ‘자연의 신비’라는 기의(Signified)를 읽어낸다.


반면, 민달팽이는 이 모든 기표를 박탈당한 존재다.

껍데기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장치 없이 자신의 연약하고 축축한 실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에게서는 오직 ‘끈적거림’, ‘흐물거림’, ‘정체불명’이라는 날것의 기의만이 느껴질 뿐이다.


시각장애인에게 이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다가온다.

달팽이를 만지는 것은 단단하고 예측 가능한 구조(껍데기)와 부드럽고 미끄러운 생명(속살) 사이의 흥미로운 촉각적 대비(Tactile Contrast)를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민달팽이는? 그저 예측 불가능한 미끄러움, 그 자체다.

이는 마치 잘 짜인 논문을 읽는 것과, 두서없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전자는 안정감을, 후자는 혼돈을 준다.


결국 이 문제는 미학(Aesthetics)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왜 달팽이 껍데기의 나선에서는 황금비율을 찾으려 하면서, 민달팽이의 움직임에서는 아무런 미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질서(Order)와 구조(Structure)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껍데기는 그 질서의 상징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껍데기’를 지니고 살아간다.

직업이라는 껍데기, 옷이라는 껍데기, 예의 바른 말투라는 껍데기.

이 모든 것은 민달팽이처럼 연약하고 혼란스러운 내면을, 달팽이처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존재로 보이게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일지 모른다.

그러니 당신의 껍데기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라.

그것이야말로, 이 험한 세상에서 당신을 덜 징그럽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생존 장비일 테니.



비하인드 스토리


보보가 시장에서 사 온 ‘번데기’를 간식으로 내밀었다.

고소한 냄새. 나는 맛있게 먹었다.

그때, 그녀가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자기야, 얘네 살아있을 땐 이렇게 생겼대.”

화면낭독기가 읽어주는 이미지 설명: ‘수백 마리의 흰색 애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음.’

그렇다.

‘조리된 번데기’라는 껍데기가 벗겨지는 순간, 나의 미식은 처절한 비명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번데기를 볼 때마다 그 꿈틀거림을 떠올린다.

앎은 때로 이렇게 잔인하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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