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은 고발할 수 있지만, 냄새는 왜 묵비권을 행사함?

by 김경훈


보보와 함께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의 동승자는 헤드폰에서 새어 나오는 트로트를 온몸으로 즐기시는 흥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뽕짝” 소음이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진짜 공격은 다른 곳에서 들어왔다.

그가 입고 있는 눅눅한 덜 마른빨래 냄새.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

그 안에서는 강력한 생화학 무기, ‘음식물’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나는 청년에게 정중하게 부탁할 수 있다.

“저기, 죄송하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요.”

그러면 그는 아마 볼륨을 줄여줄 것이다.

하지만, “저기, 죄송하지만 냄새가 너무 심해서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소음에는 항의할 수 있지만, 냄새에는 침묵해야만 하는가?


이 기묘한 비대칭은 소음과 냄새가 점유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음은 ‘공적 영역(Public Sphere)’의 문제다.

그것은 외부 환경의 일부이며, 우리는 그 환경을 조율할 사회적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냄새는 다르다.

그것은 한 개인의 몸과 식습관, 위생 상태와 직결된, 지극히 ‘사적 영역(Private Sphere)’의 문제다.

냄새에 대한 지적은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닌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단순한 불편함의 표현을 넘어, 상대의 실존을 부정하는 무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각 정보 없이 세상을 파악하는 이에게, 냄새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공간과 사람을 식별하는 중요한 데이터(Data)이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방금 담배를 피웠는지, 빵집에서 나왔는지, 혹은 비에 젖었는지를 냄새로 먼저 파악한다.

냄새는 보이지 않는 정체성이자, 가장 정직한 이력서다.

그렇기에 이 ‘후각적 침입(Olfactory Invasion)’은 물리적인 침입만큼이나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결국 냄새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수치심이라는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음은 기술의 문제지만, 냄새는 몸의 문제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통제하지 못할 때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는 냄새가 이성보다 원초적인 감각, 즉 우리의 동물적 본능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리는 문명의 언어이고, 냄새는 본능의 언어다.

우리는 문명의 규칙에 따라 소음을 통제할 수는 있지만, 본능의 영역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회적 금기(Social Taboo)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음식물 냄새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용히 숨을 참을 뿐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직접 만든 음식물을 ‘완벽 밀폐 용기’에 담아 보보의 차를 얻어 탔다.

나는 이 위대한 발명품의 성능을 굳게 믿었다.

그녀가 운전 중 갑자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차 안으로 들이쳤다.

“자기야, 왜 그래? 안 추워?”

그녀가 조용히 답했다.

“아니, 그냥… 환기 좀 시키려고.”

그렇다.

그녀는 내게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창문을 열었던 것이다.

때로는 침묵과 행동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정직하다.

그날, 나는 나의 음식물이 완벽한 생화학 무기임을 깨달았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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