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미스터리

노란 선 안쪽은 어디인가?

by 김경훈


지하철 승강장.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노란 선 안쪽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이 안내 방송을 들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실존적 고뇌에 빠진다.

잠깐만.

‘노란 선 안쪽’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안전한 플랫폼이 ‘바깥’이고, 저 시커먼 터널과 선로가 ‘안쪽’이라는 말인가?

이 얼마나 친절하고도 살벌한 살자 권유인가!


이 기묘한 언어의 미스터리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화시법(Deixis)의 실패 사례다.

‘안’과 ‘밖’, ‘이쪽’과 ‘저쪽’ 같은 단어들은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방송 시스템은 ‘승강장 전체가 하나의 방’이라는 공간적 관점(Spatial Perspective)을 전제하고, 그 방의 ‘안쪽’으로 물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승강장에 선 개인에게, ‘안쪽’은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한 방향이거나, 혹은 열차가 달려오는 저 위험한 공간을 향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 디자인의 명백한 실패다.

시스템은 모든 사용자가 자신과 동일한 시각적 맥락을 공유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척하면 척’ 알아들을 것이라는 이 오만한 가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UI)다.

시각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안내 방송은 해석 불가능한 암호이자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다.


이 ‘관점의 비극’은 얼마 전 집에서도 벌어졌다.

새로 산 청소기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다, 보보에게 물었다.

“자기야, 이거 어디다 둘까?”

그녀는 소파에 누워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저기 안쪽에 둬.”

저기 안쪽이 어디란 말인가. TV 안쪽인가 소파 안쪽인가 아니면 그녀의 마음 안쪽인가.

결국 청소기는 한 시간 동안 거실을 방황하다, TV와 소파 사이 애매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안쪽’은 나에게는 영원한 미스터리였다.


“안전선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라는 간단하고 명료한 표현이 있음에도, 우리는 왜 굳이 ‘노란 선 안쪽’이라는 모호한 언어를 사용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시각 중심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진정한 소통과 안전은 모두가 같은 그림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그림을 보고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비하인드 스토리


보보에게 이 ‘안쪽’의 철학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까, ‘안’이라는 건 말이야…”

그녀가 나를 잠시 보더니 말했다.

“자기야, 그래서 아까 내가 냉장고 ‘안쪽’에 넣어두라고 한 치즈는 찾았어?”

그렇다.

나는 냉장고 문 쪽에서 치즈를 찾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안쪽’은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그날, 나는 위대한 철학적 고찰 대신, 치즈 하나를 찾아 냉장고를 통째로 뒤져야 했다.

나의 패배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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