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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에서 용을 만나는 법

(어느 시각장애인 게이머의 뇌피셜)

by 김경훈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 게임 판타지 소설이 있다.

주인공이 가상현실 캡슐에 들어가, 오감을 완벽하게 구현한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

그러다 문득, 소파 옆에서 이 모든 설명을 듣고 있던 철학 박사 보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야, 만약 저런 가상현실 게임이 진짜 있다면,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플레이할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본다’는 행위의 본질을 묻는 지극히 인지과학적(Cognitive Science)인 탐구의 시작이었다.

특히, 나처럼 세상을 보았던 기억을 가진 후천적 중도 실명인의 경우는 어떨까?

시신경은 살아있고, 안구에는 손상이 없다면?


이것은 단순한 VR을 넘어,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BCI)의 영역이다.

게임 캡슐은 손상된 시신경 경로를 우회하여, 시각 정보를 전기 신호로 변환한 뒤 뇌의 시각 피질에 직접 전송하는 것이다.

눈이 아니라, 뇌로 직접 ‘보는’ 방식. 이 얼마나 짜릿하고도 급진적인 감각 대체(Sensory Substitution)인가!


하지만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보게 될까?

후천적 중도 실명인의 뇌는 세상을 ‘보았던’ 기억의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다.

게임이 ‘용(Dragon)’의 시각 데이터를 뇌로 전송했을 때, 과연 뇌는 그 데이터를 그대로 출력할까?

아니면, 과거에 보았던 영화 속 용의 이미지, 도마뱀의 피부 질감, 박쥐의 날개 모양 같은 저장된 기억의 파편들을 불러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용’을 재구성해낼까?


이것은 한 존재가 경험하는 주관적인 감각의 질, 즉 퀄리아(Qualia)의 문제다.

게임이 정의한 ‘붉은색’과, 내가 기억하는 ‘사과의 붉은색’이 뇌 속에서 충돌할 때, 과연 어떤 ‘붉은색’을 체험하게 될 것인가.

가상현실 속에서의 ‘봄’은 내가 기억하는 봄의 햇살과 바람 냄새까지도 함께 소환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시각장애인의 가상현실 체험은 개발자가 설계한 세계를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각의 기억과 새로운 데이터가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창조해 내는 능동적인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히 게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선다.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고,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세계를 다시 한번 걷고 싶다는 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비하인드 스토리


호기심에 VR 헤드셋을 써봤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과일을 자르는 단순한 게임. 나는 왕년의 기억을 되살려 허공에 대고 현란한 칼질을 시작했다.

‘이 정도쯤이야!’

바로 그 순간, 발밑에서 “깨갱!”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 나의 화려한 검술은 허공이 아니라, 간식을 달라고 발치에 와 있던 탱고의 콧등에 명중했던 것이다.

녀석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댔다.

가상현실 속의 나는 전사였지만, 현실의 나는 그저 자기 집 강아지나 때리는 동네 바보 형이었다.

뇌로 직접 보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얌전히 현실에 집중해야겠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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