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의 장류 코너는 일종의 가면무도회장이다.
화려한 포장과 큼직한 글씨, ‘전통’과 ‘명품’을 외치는 문구들이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소비자를 유혹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이 선택의 과정은 작은 전투다.
스마트폰 앱을 켜고, 포장지 위를 더듬으며 성분표를 읽어야 한다.
빛 반사와 포장지의 굴곡에 따라 앱의 인식률은 요동치고, 종종 제품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사실을 몇 분이 지나서야 깨닫기도 한다.
이 모든 인지적 부하(Cognitive Load)를 감수하면서 ‘진짜 고추장’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식탁에 오르기 때문이다.
진짜 고추장은 겉모습이 아니라, 성분표 속 몇 줄의 문장에 숨어 있다.
고춧가루 함량 10% 이상, 그리고 메줏가루와 엿기름.
이 세 가지가 고추장의 영혼이다.
반대로 피해야 할 성분도 명확하다.
찹쌀 대신 밀가루, 조청 대신 물엿.
이들은 비용 절감을 위한 산업적 타협의 산물이다.
화려한 포장(기표, Signifier)과 실제 내용물(기의, Signified)이 다른, 일종의 기호학적(Semiotic) 사기극인 셈이다.
결국 고추장을 고르는 행위는 단순한 구매를 넘어, 내 삶과 식탁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패키지가 예뻐서, 혹은 광고에서 봤다는 이유로 고르지 않는 것.
대신 한 줄 한 줄 성분을 읽고 판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먹는 이의 자존감이며, 가장 일상적인 소비자 주권(Consumer Sovereignty)의 실천이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를 찌개의 맛은 단순한 레시피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 맛은 마트 한켠에서의 오랜 망설임과 탐색, 그리고 그 끝에 이룬 작은 승리의 결과물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그렇게 고심 끝에 ‘진짜 고추장’을 사 들고 온 날.
보보가 저녁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한 입 먹는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야, 이 고추장… 좀 다른데?”
보보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응, 자기가 사 온 건 아까워서 아껴두고, 이건 그냥 옆에 있던 걸로 했어.”
그렇다.
나의 치열했던 전투는 보보의 ‘아낌’ 앞에서 한낱 무용담이 되고 말았다.
떡볶이 맛은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