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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통장 잔고는 쓸모없었지만

내 여행은 쓸모 있었다

by 김경훈


내 이름은 방구석. 성은 ‘나’다. 나의 유일한 여행지는 침대에서 책상까지, 책상에서 냉장고까지 이어지는 ‘골든 트라이앵글’이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계절의 변화는 그저 스마트폰 배경화면 같은 것이었고, ‘떠남’이라는 단어는 내 통장 잔고 앞에서는 늘 작아지는 비현실적인 사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중고 서점의 ‘오늘의 추천’ 코너에서 운명처럼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정여울 작가의 《여행의 쓸모》. ‘쓸모없는 여행은 없다’는 도발적인 문장이 쓸모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내 심장을 저격했다. 나는 홀린 듯 그 책을 집어 들었다.



1. 멈춤의 시간, 쓸모를 발견하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 잿빛 원룸에 있지 않았다. 노르웨이 달스니바 전망대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여행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고, 영국 하워스의 덜컹이는 증기기관차에 앉아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멈췄던 그 막막한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그녀는 오히려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여행의 진짜 ‘쓸모’를 발견했다고 했다. 다시 떠날 날을 기다리며, 지금 머무는 이곳의 작은 기쁨들을 발견하는 것. 매일 걷던 골목길에서 새로운 풍경을 찾아내고,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밋밋한 아파트 단지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저곳을 ‘여행’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책을 덮고,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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