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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커피 한 잔이

아마존의 나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by 김경훈


나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가치보다는 500원 더 비싼 아메리카노를 위한 그럴듯한 마케팅 문구라고 믿는 지극히 속물적인 청년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마신 커피 한 잔에 담긴 거대한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카페 의자에 주저앉아 있다.



1. 9,500원짜리 ‘착한 커피’의 맛


그날 나는 면접 광탈의 쓴맛을 달래기 위해 시내에서 가장 힙한 카페를 찾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바, 그리고 바리스타의 현란한 손놀림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된 공간이었다. 키오스크 메뉴판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워시드, 레인포레스트 얼라이언스 인증’ 같은 암호에 가까운 단어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왕이면 가장 비싸고,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내 이름은 고민준(高旻俊). 이름처럼, 나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과하게 고민하는 피곤한 인간이다. 나는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재배된’이라는 문구에 홀려, 9,500원짜리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내 앞에 놓인 커피는 정말이지 ‘착한 맛’이 났다. 은은한 산미와 꽃향기. 나는 이 커피 한 잔이 지구 어딘가의 숲과 농부를 지켜냈을 거라는 뿌듯함에 젖어, 스마트폰으로 ‘지속 가능한 커피’를 검색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방금 마신 이 ‘착한 커피’가 얼마나 복잡하고, 때로는 잔인한 질문들 위에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2. 라벨 뒤에 숨겨진 농부의 주름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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