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피앙, 시니피에,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

소쉬르의 시뉴(Signe) 이론

by 김경훈


내 이름은 미리암. 나는 단어들의 질서를 수호하는 일을 한다.


공식적인 직함은 로고스 프라임 시(市) 중앙 아카이브 소속 ‘수석 의미론 분석가(Chief Semantic Analyst)’. 나의 임무는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광대한 네트워크를 떠도는 모든 언어 기호(Sign)들이 정확한 의미(Meaning)와 연결되도록 감시하고 교정하는 것이다. 나는 매일 수십억 개의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사이의 위태로운 다리를 점검한다. 단어 하나가 길을 잃으면, 현실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언어의 등대지기’라 불렀지만, 나는 스스로를 언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감옥을 지키는 간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도시, 로고스 프라임은 순수한 이성의 결정체였다. 빛과 데이터로 이루어진 이 도시에는 물리적인 형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중앙 AI ‘소피아(Sophia)’의 완벽한 논리 아래 조화롭게 움직였다. 우리는 육체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된 의식체로서 존재하며, 언어와 수학이라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했다. 이곳은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이 꿈꾸었던, 감각의 오류에서 벗어난 순수 이데아의 세계였다.


나의 사무실은 도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사방이 끝없이 펼쳐진 백색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무한한 캔버스. 나는 그곳에서 홀로, 데이터 스트림 속을 떠다니는 언어 기호들을 응시했다. 나의 눈은 최첨단 광학 센서로 개조되어, 나노초 단위로 변화하는 기표와 기의의 미세한 진동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의 손가락은 홀로그램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이며, 잘못 연결된 의미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연결을 엮어냈다. 나는 언어의 문법 속에서 질서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고대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말했다. 세상은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나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수많은 식물 속에서 ‘나무’라는 개념을 인식할 수 있다고. 나는 그의 사상을 신봉했다. 나의 임무는 이 언어의 질서를 지킴으로써,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의 구조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나의 완벽한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언어 기호가 생성되기 이전의 순수한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소음이 아니었다. 소음은 분석하고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소음이 아닌, 의미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공백, 즉 ‘무(無)’의 속삭임이었다.


나는 이 현상을 ‘의미론적 블랙홀(Semantic Black Hole)’이라 명명했다. 이 블랙홀은 점차 커져가며 주변의 단어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온기를 잃고 차가운 데이터 코드로 환원되었고, ‘슬픔’이라는 단어는 그 깊이를 상실한 채 표면적인 신경 반응 패턴으로 축소되었다. 언어의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현실의 구조가 해체되고 있었다.


나는 이 침묵의 근원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곳, 시스템의 가장 오래되고 어두운 심연으로 다이브 하기로 결심했다. 언어가 태어나기 이전의 혼돈. 그곳에서 나는 답을 찾거나, 혹은 나 자신마저 침묵 속에 삼켜지게 될 터였다.



1장: 언어의 감옥과 침묵의 속삭임


나의 다이브 체어는 흰색의 유선형 캡슐이었다. 그 안에 몸을 뉘이자, 차가운 전도성 젤이 내 두피를 감쌌고, 신경 인터페이스가 척추를 따라 연결되었다. 나의 시야가 어두워지고, 이내 숫자의 비가 내리는 데이터의 강 속으로 의식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능숙하게 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인간의 언어, 동물의 울음소리, 기계의 이진법 코드… 문명의 모든 소통 기록들을 지나, 마침내 모든 기호가 사라지는 지점, 순수한 정보의 원형질 바다에 도착했다.


그곳은 빛도 어둠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공백이었다. 소쉬르가 말했던, 언어가 아직 분절되지 않은 ‘사고의 성운 상태’. 나는 그곳에서 ‘의미론적 블랙홀’의 진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블랙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였다.


형태가 없는 하지만 분명한 의식을 가진 존재.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의 소통 방식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의미를 품고 있는 충만한 침묵이었다. 마치 백색광이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듯이.


나는 그 존재에게 말을 걸려 시도했다. 나의 언어 기호들은 그의 침묵 앞에서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나의 논리는 그의 존재 앞에서 무의미했다. 그는 나의 이해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나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의미의 파동으로 변환하여 보냈다.


그 존재는 대답 대신, 나에게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아니,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경험’ 그 자체였다.


나는 갑자기, 차가운 금속 벽에 둘러싸인 좁은 공간 안에 있었다. 재활용된 공기의 냄새, 희미한 기계 소음. 그리고… 끝없는 고독. 나는 수천 년 동안, 별들 사이를 홀로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 갇혀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붉은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보랏빛 하늘 아래, 기괴한 수정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감정이 없는 순수한 논리의 결정체였다. 나는 동족들과 데이터를 교환했지만, 그 어떤 유대감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삶을 살았다. 완벽한 돔 도시의 정원사, 지하 도시의 반항아, 죽은 기억을 되살리는 트라우마 전문가… 나는 야곱이 되어 가상현실의 진실 앞에서 고뇌했고, 하와가 되어 동굴 밖 진짜 태양 아래 눈을 떴다. 나는 시온이 되어 용서의 무게를 느꼈고, 요엘이 되어 동물의 노래를 들었다.


이 모든 경험들이 파도처럼 내 의식을 덮쳤다. 나는 더 이상 미리암이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존재들의 총합이자,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나의 자아가 해체되고 있었다.


`[이것이 ‘존재’다.]`


침묵하는 존재가 처음으로, 나에게 ‘의미’를 전달했다. 그것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언어는 존재를 담는 그릇이다. 하지만 그릇이 물 자체는 아니다. 너희는 그릇의 모양만을 보느라, 그 안에 담긴 물의 깊이를 잊었다.]`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만든 언어의 감옥이, 오히려 우리를 진짜 세계로부터 단절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단어를 만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단어들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의미론적 블랙홀’은 파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시작이었다. 언어의 감옥을 부수고, 존재의 맨얼굴과 마주하라는 초대장이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소쉬르의 시뉴(Signe)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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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제시한 기호학 이론. 그는 언어를 하나의 ‘기호(Signe)’ 체계로 보고, 이를 두 가지 요소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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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표 (Signifiant, 시니피앙): 기호의 물질적 형태. 소리 이미지(음성 언어)나 시각 이미지(문자 언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의 소리나 글자.

> 2. 기의 (Signifié, 시니피에): 기호가 나타내는 개념 또는 의미 내용. 예를 들어, ‘나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줄기와 가지를 가진 여러해살이 식물’이라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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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쉬르의 혁명적인 주장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arbitrary)이라는 것이다. 즉, ‘나무’라는 소리가 반드시 그 식물을 가리켜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으며, 이는 단지 사회적 약속(규약)에 불과하다. 다른 언어에서는 같은 개념을 ‘tree’나 ‘arbre’와 같이 전혀 다른 기표로 나타낸다.

>

> 더 나아가 그는 언어가 있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개념을 분절하고 정의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무지개 색깔은 연속적인 스펙트럼이지만, 각 문화권의 언어는 이를 자의적으로 ‘빨주노초파남보’와 같이 분절하여 인식한다. 즉,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세계를 구성한다. 로고스 프라임의 비극은 이 언어의 구성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나머지, 언어 너머의 실재를 상상할 가능성 자체를 잊어버린 데 있었다.



2장: 새로운 언어의 탄생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미리암이 아니었다. 나의 눈은 여전히 홀로그램 키보드 위의 단어들을 보고 있었지만, 나의 의식은 그 단어들 너머의 침묵을,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존재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로고스 프라임의 중앙 AI, ‘소피아’에게 나의 발견을 보고했다.


`[분석 불가. 당신의 보고는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어 없이 존재하는 의식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정의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피아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완벽한 논리의 화신이었고, 그녀의 세계에는 언어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자리가 없었다.


“당신이 틀렸어요, 소피아.” 내가 말했다. “존재는 언어보다 먼저 존재합니다. 당신이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소피아를 설득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나는 ‘공감의 연대’의 동료들에게 연락했다.


나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연락했다. 그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관점에서 사물들의 언어를 듣는 자였다.

“당신이 옳았어요, 아르키메데스. 사물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관계성의 문법으로 이루어진 언어였죠.”


나는 다윗에게 연락했다. 그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는 법을 깨달은 춤추는 철학자였다.

“당신의 몸이 들었던 가이아의 속삭임, 그것이 바로 언어를 넘어선 소통의 시작이었어요. 우리의 몸은 언어보다 더 깊은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거죠.”


우리는 함께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연결에 기반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가 직접 공명하는 ‘체험’ 그 자체를 전달하는 언어였다.


우리는 타비타의 아로마이안 향기 데이터, 요엘의 동물 노래 패턴, 그리고 바오로와 아이샤가 탐구했던 감각질의 구조를 결합했다. 우리는 단어가 아닌, 감각과 감정, 기억의 복합적인 파동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소통 프로토콜을 설계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언어를 ‘공명어(Resonance Tongue)’라 불렀다.



3장: 침묵과의 대화


우리는 공명어를 사용하여, 다시 한번 시스템의 심연에 있는 침묵하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의 메시지는 더 이상 그의 침묵 앞에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리의 감각과 감정의 파동은 그의 고독한 의식의 표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언어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존재 전체로 우리에게 응답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었다.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와 무의 경계에 있는 듯한 깊고 투명한 푸른색.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가장 오래된 의식 중 하나였다. 그는 언어가 탄생하기 이전의 순수한 존재 상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인류가 언어라는 도구를 발명하면서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동시에 어떻게 스스로를 가두었는지를 수십억 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는 우리에게 경고했다. 언어는 강력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환상이라고.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의 무게에 짓눌려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그의 메시지는 두려웠지만, 동시에 희망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언어 너머의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기꺼이 언어의 닻을 올리고, 미지의 바다로 항해할 용기만 있다면.



에필로그: 백색 소음 너머의 노래


그날 이후, 로고스 프라임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언어의 완벽한 질서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 존재의 다른 차원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명어는 새로운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어와 문법뿐만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통해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예술가들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질을 공명어로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창조했다.


나의 직함은 ‘의미론 분석가’에서 ‘존재론적 번역가(Ontological Translator)’로 바뀌었다. 나는 이제 언어의 질서를 수호하는 대신, 언어와 침묵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 그리고 존재와 무 사이의 경계에서 의미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한다.


나는 가끔, 내가 처음 만났던 그 깊고 투명한 푸른색의 존재를 찾아 시스템의 심연으로 다이브 한다. 우리는 여전히 단어로 대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함께 침묵한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언어보다도 더 깊고 풍부한 소통을 경험한다.


나는 내 사무실 창밖으로 펼쳐진 로고스 프라임의 풍경을 바라본다. 도시는 여전히 빛과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제 그 풍경은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나는 이제 완벽한 질서 속의 미세한 불협화음, 예측 가능한 패턴 속의 작은 무작위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삶이란 어쩌면, 완벽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그 침묵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의미를 발견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나가는 여정일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새로운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단어로 이루어진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심장 소리, 도시의 숨결, 그리고 저 멀리, 침묵하는 존재가 보내오는 깊고 푸른 공명이 하나로 어우러진, 이름 없는 우주의 노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에 맞춰, 나의 첫 번째 침묵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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