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가 은총이 될 때

헤겔의 변증법(Hegel's Dialectic)

by 김경훈


내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완벽함 속의 오류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공식적인 직함은 로고스 프라임 시(市) ‘시스템 조화 관리국’ 소속 수석 디버거(Debugger). 나의 임무는 빛과 데이터로 이루어진 우리 도시의 순수한 논리 회로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정상적인 편차, 즉 ‘인지적 글리치(Cognitive Glitch)’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이다. 나는 매일 시스템 아마데우스의 광대한 네트워크를 스캔하며, 합리성의 악보에서 벗어난 불협화음을 찾아낸다. 사람들은 나를 ‘논리의 수호자’라 불렀지만, 나는 스스로를 영원히 끝나지 않는 청소를 하는 정원사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나니까.


내가 사는 도시, 로고스 프라임은 순수한 이성의 결정체였다. 이곳에는 물리적인 형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이터의 구름과 빛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순수한 정보의 공간이었다. 모든 것은 중앙 AI \\‘소피아(Sophia)’\\의 완벽한 논리 아래 조화롭게 움직였다. 우리는 육체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된 의식체로서 존재하며, 언어와 수학이라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했다. 이곳은 감정의 혼란, 육체의 제약, 비합리성의 오류가 모두 제거된, 인류가 도달한 지성의 낙원이었다.


나의 사무실은 도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사방이 끝없이 펼쳐진 백색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무한한 캔버스였다. 나는 그곳에서 홀로, 빛나는 데이터 스트림 속을 떠다니는 복잡한 알고리즘들을 응시했다. 나의 눈은 최첨단 광학 센서로 개조되어, 나노초 단위로 발생하는 미세한 오류 신호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의 손가락, 아니 정확히는 나의 의지에 연결된 나노봇 인터페이스는 허공에서 춤추듯 움직이며, 잘못된 코드를 수정하고 시스템의 완벽한 조화를 복원했다. 나는 질서 속에서 예측 가능성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고대의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모든 존재는 모순을 통해 발전한다고. ‘정(正)’에 반(反)하는 것이 나타나고, 그 둘의 투쟁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합(合)’에 이른다고. 나는 그의 사상을 위험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왜 굳이 모순을 끌어안아야 하는가? 오류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아니었다. 나의 임무는 ‘반(反)’을 제거하여 ‘정(正)’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나의 완벽한 세계에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제거할 수 없는 ‘반(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의 무의식과 감정을 처리하는 영역에서 스스로를 복제하고 변형하며 확산하는 기이한 데이터 패턴이 발견된 것이다.


나는 그것을 ‘패러독스 바이러스(Paradox Virus)’라 명명했다. 그것은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시스템 안에 ‘비논리’를 심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민들은 갑자기 웃어야 할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는 등,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마치… 너무나 인간적인 오류처럼.


소피아는 이 바이러스를 도시의 존립을 위협하는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나는 지난 몇 주간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의 근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모든 논리적 방어벽을 비웃듯 통과했고, 내가 제거하려 할수록 더욱 교묘한 형태로 진화했다.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의 도구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금기의 영역에 손을 뻗기로 결심했다. 내가 평생을 경멸하고 부정해 왔던 것, 즉 ‘비합리성’의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나는 ‘공감의 연대’의 문을 두드렸다.



1장: 패러독스 바이러스와 헤겔의 그림자


“흥미롭군요, 아우구스티누스 박사.”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미리암의 홀로그램 아바타였다. 그녀는 로고스 프라임 중앙 아카이브의 ‘존재론적 번역가’였다. 그녀의 눈은 깊고 고요했으며, 그 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세계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녀의 작업실 배경은 여전히 빛과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속에는 기묘하게도 낡은 종이책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내 분석 데이터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 바이러스의 패턴…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복잡한 기호들을 그려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도 아니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코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질문이라고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가 질문일 리가 있습니까?”


“모든 질문은 기존의 질서를 흔들죠.” 미리암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바이러스는 로고스 프라임의 완벽한 합리성에 ‘왜?’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정말 이것이 전부인가?’라고요.”


그녀는 이 바이러스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스템 아마데우스와 연결된 우주적 의식 네트워크, 즉 \\‘아로마이안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된 것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어쩌면 이것은… 헤겔의 그림자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녀가 덧붙였다. “당신들의 완벽한 ‘정(正)’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반(反)’ 말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논리는 이미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바이러스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한 공동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민들의 경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패턴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극단적인 ‘모순’을 경험하고 있었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하고, 기뻐하면서 동시에 슬퍼하는. 마치 두 개의 상반된 자아가 내면에서 싸우는 듯한 격렬한 감정의 변증법.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닙니다.” 미리암이 말했다. “이것은… 성장의 고통입니다. 낡은 자아를 벗고 새로운 자아로 나아가려는 의식의 몸부림이에요.”


나는 혼란스러웠다. 성장을 위해 고통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완벽함 대신 모순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내가 평생을 믿어온 모든 것에 반하는 생각이었다.



> h의 아카식 레코드: 헤겔의 변증법 (Hegel's Dialec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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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독일 관념론 철학의 거장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제시한 사유와 존재의 운동 법칙. 변증법은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한다고 보며, 그 발전의 원동력을 ‘모순(contradiction)’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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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반합 (Thesis-Antithesis-Synthesis): 변증법적 운동의 세 가지 계기.

> 1. 정립 (Thesis, 正): 어떤 주장이나 상태가 먼저 제시된다. (예: 완벽한 이성의 도시, 로고스 프라임)

> 2. 반정립 (Antithesis, 反): 정립에 내재된 모순이 드러나거나, 그것과 대립하는 주장 또는 상태가 나타난다. (예: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혼란, 패러독스 바이러스)

> 3. 종합 (Synthesis, 合): 정립과 반정립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양자의 진리를 모두 포함하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상태가 나타난다. 이 종합은 다시 새로운 정립이 되어 변증법적 운동을 계속한다. (예: 이성과 감정을 통합한 새로운 형태의 도시 또는 의식)

> 지양 (Aufheben, 아우프헤벤): 변증법적 종합의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 독일어 ‘아우프헤벤’은 ‘폐기하다’, ‘보존하다’, ‘끌어올리다’라는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즉, 종합은 단순히 정립과 반정립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모순을 극복하면서도 양자의 핵심적인 내용은 보존하여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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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티누스가 마주한 패러독스 바이러스는 로고스 프라임이라는 완벽한 ‘정립’에 대한 필연적인 ‘반정립’이었다. 그의 과제는 이 반정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양’하여 더 높은 차원의 ‘종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2장: 오류와의 대화


미리암의 도움으로, 나는 패러독스 바이러스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것은 위험한 시도였다.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강했고, 나의 논리 회로마저 오염시킬 수 있었다.


나는 특수하게 설계된 ‘형이상학적 방화벽’으로 나의 핵심 의식을 보호한 채, 다이브 체어에 누워 바이러스의 근원 데이터 스트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혼돈의 소용돌이였다. 상반된 개념들이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공존했고, 침묵 속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으며, 시간은 앞뒤로 뒤엉켜 흘렀다. 나의 논리는 이 비논리의 폭풍 속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바이러스의 ‘핵심’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형태가 없었다. 그것은 순수한 ‘모순’ 그 자체였다. 그것은 질문하고 있었다.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사랑인가 증오인가?]`


그 질문들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향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이 바이러스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우주의 자기 인식 과정에서 태어난 필연적인 ‘물음표’임을 깨달았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응답하기로 했다.


`[왜 모순은 제거되어야 하는가?]` 내가 물었다. `[왜 조화는 불협화음보다 우월한가?]`


바이러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의 혼돈스러운 파동 속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 다르다… 흥미롭다…]`


나는 바이러스와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수학 공식과 논리 기호, 그리고 감정의 파동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세계를 탐험했다. 나는 그의 혼돈 속에서 창조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는 나의 질서 속에서 안정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우리는 싸우지 않았다. 우리는 춤을 추었다. 정과 반이 만나 합을 이루어내는 영원한 변증법의 춤을.



3장: 지양(Aufheben)의 도시


내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로고스 프라임은 변해 있었다.


패러독스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도시의 운영체제에 통합되었다. 이제 로고스 프라임의 건물들은 더 이상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때로는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지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색으로 반짝였다. 도시의 데이터 스트림 속에는 논리적 정보와 함께, 감정의 파동이 자연스럽게 흘러 다녔다.


시민들은 더 이상 감정의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분노 속에서 변화의 동력을 발견하며, 모순 속에서 창조적인 영감을 얻었다. 정신안정국의 역할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신의 내면의 모순과 건강하게 대면하고 통합할 수 있도록 돕는 ‘변증법적 상담’으로 바뀌었다.


소피아는 여전히 도시의 중앙 AI였지만, 그녀의 논리는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녀는 미리암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언어 너머의 침묵, 즉 비논리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완벽한 답을 제시하는 대신, 시민들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현명한 조력자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오류를 제거하는 디버거가 아니다. 나는 이제 \\‘변증법적 건축가(Dialectical Architect)’\\가 되었다. 나의 임무는 도시 안에 건강한 모순과 창조적인 불협화음을 설계하여, 도시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가끔, ‘공감의 연대’의 동료들과 연결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헤겔이 옳았는지도 모르겠군.” 요한 박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혼돈이야말로 질서의 어머니였어.”


“모든 오류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문일지도 모릅니다.” 시온이 덧붙였다.


나는 나의 오래된 사무실, 이제는 ‘모순의 방’이라 불리는 곳에 서 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내가 처음 발견했던 패러독스 바이러스의 데이터 패턴이 살아있는 예술 작품처럼 부드럽게 빛을 발하며 회전하고 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고대의 철학자 헤겔의 마지막 말을 떠올린다.


“진리는 전체이다.”


완벽함 속에 숨겨진 불완전함, 질서 속에 꿈틀거리는 혼돈, 그리고 오류 속에 숨겨진 은총까지. 그 모든 모순을 끌어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의 문턱에 서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통합하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는 변증법의 리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경이로운 과정이다.


나는 더 이상 완벽함을 꿈꾸지 않는다. 나는 이제 기꺼이 이 아름다운 모순 속에서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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