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우리는 이 음식을 너무나 잘 안다고 착각한다. 소풍날 아침의 설렘, 분식집의 늦은 저녁, 혹은 편의점의 간편한 한 끼. 그러나 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시스템이자, 압축된 우주다. 밥이라는 플랫폼 위에 단무지, 계란, 시금치, 우엉이라는 각기 다른 속성의 데이터가 질서정연하게 배열되고, 김이라는 견고한 프레임워크가 이 모든 것을 감싸 안아 하나의 유의미한 정보 덩어리로 완성된다. 우리는 김밥 한 줄을 통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각기 다른 요소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완벽한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를 목격한다. 이것은 그 완벽한 시스템의 해체와 재구성에 대한, 어느 하루의 미식(美食)적 기록이다.
1. 관제탑의 호출
화요일 오후, 김경훈의 아이폰이 기묘한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것은 학술 논문도, 뉴스 기사도 아니었다. 얼마 전 스코틀랜드의 깔따구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마봉 드 포레 작가가 보낸, ‘긴급 소집 명령’이라는 제목의 메시지였다.
“기장입니다. 레이디즈 앤 젠틀맨, 디스 이즈 캡틴 스피킹. 브런치항공 BR001 아무말행 항공편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현재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김밥을 마는 중입니다. 기상은 대체로 양호하지만 중간에 약간의 김밥 옆구리 터짐이 있을 예정입니다….”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발치에 엎드려 있던 안내견 탱고가 꼬리를 ‘툭, 툭’ 치며 화답했다. 그는 그녀의 이런 예측 불가능한 혼돈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의 질서정연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유쾌한 바이러스였다. 그는 그녀가 보낸 주소, ‘미성당 김밥’이라는 상호를 음성으로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대김밥은 경북대학교 북문 근처,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새콤한 단무지 냄새, 그리고 따뜻한 밥의 온기가 그의 모든 감각을 부드럽게 감쌌다. 가게 안은 좁았고, 네댓 개의 테이블만이 전부였다. ‘타닥, 타닥’ 하고 주인 할머니의 칼이 도마 위에서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는 소리, 냉장고의 낮은 저주파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여기요, 작가님! 이쪽!”
마봉 드 포레의 바삭거리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이미 김밥 한 줄을 거의 해치운 상태였다. 그녀는 여전히 검은색 가죽 재킷 차림이었지만,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 대신 무언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 아이처럼 설렘과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2. 야채김밥과 참치김밥의 변증법
“앉아요. 일단 기본부터 시작해야지. 여기 이모님 야채김밥이 예술이야.”
그녀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남은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김 가루가 살짝 묻어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김경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야채김밥 대신 참치김밥을 주문했다.
“왜요? 클래식은 싫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아닙니다.” 김경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야채김밥이 잘 짜인 고전 소설이라면, 참치김밥은 그 위에 새로운 주석을 다는 포스트모던 소설 같아서요. 마요네즈라는 다소 이질적이고 비논리적인 요소가 개입하면서 시스템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죠.”
“젠장, 김밥 한 줄 먹으면서 데리다를 소환하시네.” 그녀는 혀를 찼지만, 그의 해석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곧 그의 앞에, 온기가 남아있는 참치김밥 한 줄이 정갈하게 썰려 나왔다. 그는 먼저 손끝으로 김밥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는 볼 수 없었지만, 15년간의 시각적 기억을 통해 그 단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흰쌀밥의 캔버스 위에 노란 계란, 초록 시금치, 주황 당근, 갈색 우엉, 그리고 분홍빛 참치 마요네즈가 만들어내는 색의 조화.
하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촉각과 미각이었다. 그는 김밥을 입에 넣었다. 거칠면서도 바삭한 김의 질감, 고슬고슬하게 풀리는 밥알, 아삭하게 씹히는 단무지와 당근, 부드러운 계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크리미 하게 감싸 안는 참치 마요네즈의 풍미.
“이거… 완벽한 시스템이군요.”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3. 옆구리 터진 김밥에 대한 고찰
마봉 드 포레는 자신의 노트북을 열어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그녀가 쓴 칼럼의 초고가 떠 있었다. 제목은 ‘우리는 이제, 브런치를 향해 김밥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였다.
“어때요? 도발적이지 않아요?” 그녀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요즘 세상은 너무 점잖기만 해. 가끔은 이렇게 김밥이라도 던져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김경훈은 그녀의 무정부주의적인 발상에 웃음을 터뜨렸다. “물리적으로 던지시겠다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죠! 이건 은유예요, 은유! 김밥이라는 가장 한국적이고 일상적인 이 완벽한 시스템으로, 기존의 틀에 박힌 글쓰기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나의 선언이라고요.”
그녀는 칼럼의 한 구절을 읽었다. ‘기상은 대체로 양호하지만 중간에 약간의 김밥 옆구리 터짐이 있을 예정입니다.’
김경훈은 그 구절에서 잠시 멈췄다. “옆구리 터진 김밥….”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서 유쾌함이 사라지고, 연구자로서의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거야말로 핵심입니다, 작가님. 옆구리 터진 김밥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에요. 그것은 시스템 설계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오류 메시지입니다. 밥의 양이 너무 많았거나, 재료의 수분이 적절히 제어되지 않았거나, 혹은 마는 힘의 분배가 고르지 못했을 때 발생하죠. 완벽한 시스템이란, 오류가 없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 오류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버전에서 개선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는 덧붙였다. “정보 접근성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 터진 김밥’과 같은 사용자의 불편함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그 원인을 분석해서 시스템을 보완하는 일을 합니다. 옆구리가 터졌다고 해서 김밥이 아닌 것은 아니죠. 다만, 조금 더 나은 김밥이 될 수 있었을 뿐입니다.”
4. 기억의 단면, 그리고 주석
마봉 드 포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칼럼과, 김밥을 먹고 있는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귀한 자료를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반짝였다.
김경훈은 마지막 남은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문득, 그는 시력을 잃기 전, 엄마가 싸주시던 김밥의 단면을 기억해 냈다. 엄마의 김밥은 늘 조금 뚱뚱했고, 가끔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완전했던 기억.
그는 아이폰을 꺼내, 오늘의 대화에 대한 짧은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완벽한 한 줄의 시스템.
김밥은 정보 구조의 완벽한 은유다. 각 재료는 데이터, 밥은 플랫폼, 김은 프레임워크다. 맛은 사용자 경험(UX)이다. 옆구리가 터지는 것은 시스템 오류(Bug)이며, 이는 개선의 기회다.
마봉 드 포레는 김밥을 던져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어쩌면 옆구리 터진 김밥을 외면하지 않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은 한 줄을 말아보려는 그 작은 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결론: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결국 김밥을 닮았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시스템은 가장 맛있는 김밥처럼, 차가운 완벽함이 아니라 따뜻한 조화 속에 존재한다. 엄마의 김밥처럼.’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다음엔 무슨 김밥을 던지실 겁니까?” 그가 묻자, 마봉 드 포레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일단 당신의 이 김밥 존재론부터 던져봐야겠는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했고, 가게 안은 다시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