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식쟁이 돼지에게 배운 인생 레시피

by 김경훈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괴물이 무서웠다. 어릴 적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상하던 손톱 긴 귀신이나,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괴수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괴물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나를 한 가지 재료로만 정의해 버리고는 통째로 삼켜버릴 것 같은, 세상의 섣부른 시선이었다.


“아, 저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그 순간, 나는 ‘김경훈’이 아니라 ‘시각장애인’이라는 이름의 ‘단무지’가 되어버린다.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농담에 웃으며, 어떤 꿈을 꾸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저 노랗고 네모난 단무지. 사람들은 나라는 김밥의 다른 재료들은 보지 않고, 오직 가장 눈에 띄는 재료 하나로 나를 판단하고는 입맛을 다신다. 나는 그 괴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나 자신을 단단히 말아 숨기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1.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한 남자


그날 오후,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오디오북 스트리밍 사이트를漫然히 둘러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내 유일한 룸메이트이자 최고의 파트너인 안내견 탱고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녀석의 배가 숨을 쉴 때마다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무릎으로 느끼며, 나는 ‘오늘의 추천 동화’ 코너에서 우연히 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채인선 작가의 『김밥은 왜 김밥이 되었을까?』.


성우의 따뜻한 목소리가 동화의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단무지만 먹어서 노란 돼지, 시금치만 먹어서 파란 돼지, 당근만 먹어서 주홍 돼지… 이야기는 지독한 편식으로 인해 각자의 정체성을 잃고 ‘음식 재료’가 되어버린 다섯 아기 돼지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의 얘기 같지가 않았다. 나 역시 내 삶이라는 식탁 위에서 지독한 편식쟁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안전함’이라는 이름의 밥만 먹었고,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김만 고집했다. ‘도전’이라는 시금치는 썼고, ‘실패’라는 당근은 딱딱했다. 나는 온전한 ‘김경훈’이 되기보다는 그저 하얗고 밍밍한 ‘밥’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에 안주하고 있었다.



2. 걱정이 세금 청구서처럼 쌓이는 밤


동화 속 돼지 부인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혹여나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나, 자기 자식들을 진짜 음식 재료로 착각하고 한입에 삼켜버릴까 봐. 그녀의 걱정은 벽돌처럼 머리를 짓누르고, 눈처럼 차곡차곡 쌓여 집을 파묻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잠시 오디오북을 멈췄다. 돼지 부인의 걱정이 마치 내 마음 같아서였다. 나 역시 늘 걱정 속에 살았다. 세상이라는 괴물이 나타나,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 즉 ‘시각장애’라는 단무지만을 보고 나를 덥석 물어버릴까 봐. 그래서 나는 더욱 다른 재료들을 숨겼다. 농담을 좋아하는 유쾌함, 글쓰기를 사랑하는 진지함,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따뜻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하얀 밥처럼, 검은 김처럼 지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었다.


동화 속 돼지 부인은 끔찍한 악몽을 꾼다. 괴물이 나타나 색색의 아기 돼지들을 한데 돌돌 말아 입에 집어넣는 꿈.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고, 결심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괴물한테 우리 아기들을 빼앗길 수는 없지.”



3. 위대한 발명품, ‘김밥’이라는 솔루션


그녀의 해결책은 놀라웠다. 그녀는 아기 돼지들을 혼내거나 억지로 다른 음식을 먹이지 않았다. 대신, 모든 재료를 한데 모아 김과 밥으로 돌돌 말아버리는 혁신적인 솔루션을 발명해 냈다. 바로 ‘김밥’이었다.


“너희들, 맛있는 거 한 가지만 먹겠다고 했지? 자, 이걸 먹으면 돼.”


돼지 부인의 이 한마디는 내게 망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렇구나. 김밥은 ‘여러 가지를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 한 가지’를 먹는 경험이었구나. 노란 단무지, 파란 시금치, 주홍 당근, 검은 김, 하얀 밥. 제각각의 색과 맛을 뽐내던 이 재료들은, 김밥이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완전히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각자의 개성은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김밥’이라는 더 큰 정체성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단무지, ‘작가’라는 당근, ‘ENFJ’라는 시금치… 나는 이 모든 재료들을 따로따로 진열해 놓고, 세상이라는 괴물이 어떤 재료를 먼저 집어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내 인생의 괴물, 그리고 아버지


동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진짜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숨어있는 아기 돼지들을 색깔별로 귀신같이 찾아냈다. “단무지는 침대 밑에, 시금치는 광주리에!”


돼지 부인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갓 만들어낸 김밥 접시를 내밀었다. “안 돼요! 내 아기들 대신 이것을 드세요!”


그 순간,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괴물은 바로,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아빠 돼지였던 것이다. 아빠가 돌아올 때마다 하는 장난을, 엄마가 걱정에 빠져 깜빡 잊었던 것이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탱고가 내 웃음소리에 잠이 깨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래, 어쩌면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그 ‘괴물’의 정체도, 사실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장난기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시각장애인’이라는 한 가지 재료로만 보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오히려 그 ‘흠’과 ‘틈’ 때문에 사람들은 내게 더 다가와 주었고, 나의 다른 재료들에 대해 더 궁금해했다. 나의 약점은 나를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서툴지만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장난 같은 것이었을지도.


나만의 김밥을 마는 시간


나는 오디오북을 끄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돼지 부인은 다른 엄마들에게도 김밥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아기나 골고루 먹어야 하니까.


나 역시 그래야겠다. 세상의 모든 편식쟁이들에게, 특히 자기 자신의 일부분만을 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겠다. 당신의 모든 재료는 다 소중하다고. 그 재료들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말고, 기꺼이 한데 모아 당신만의 근사한 김밥을 말아보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메뉴는 정해졌다. 내 인생이라는 이름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말 시간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완벽한 한 줄의 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