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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뜻대로.

by Outis

(메인화면 제작: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은하수가 흐르는 밤.


쏴아아. 쏴아아. 잔잔한 파도는 하얀 거품으로 스러지며 모래를 쓰다듬었다. 마치 꼼짝 않는 연인의 마음을 갈구하듯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다는 땅과 섞이는 꿈을 꾸었다.


두 남녀가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다.

여자는 소매가 길고 선이 단조로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생머리가 원피스 자락과 함께 바람에 나부꼈다.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도 하얀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는데, 여자의 원피스와 재질까지 같아 보였다.


부드러운 모래는 맨발로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발가락까지 제법 선명하게 담았다.

둘의 발자국은 크기는 달랐지만 간격은 같았다. 여자의 발이 먼저 땅에 닿으면, 그에 맞추어 남자가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서로 다른 마음의 흔적이 모래 위로 이어졌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뭔가를 집어 들었다. 분홍색 조개껍데기였다. 깨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 것이 아주 예뻤다.

바닷물에 살살 달래며 모래를 씻어내자 더욱 진가가 드러났다. 달빛을 받은 조개껍데기는 영롱한 무지갯빛을 띠었다.

옆의 그녀에게 주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 남자는 흡족한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요."


여자는 남자가 내민 조개껍데기를 아무 감흥 없이 받아 들었다. 자기가 준 선물을 여자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데도, 남자는 전혀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조개껍데기를 돌려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뗐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죠?"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지만,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예쁘니까요."


"이게 예쁜 건가요?"


"제 눈에는 그런데...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단순한 궁금증 외에 아무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요."


"?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이미 알잖아요. 그런 건 누구도 할 수 없어요."


아주 미세한 동공의 움직임과 그 외의 기능적인 작용 외에,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란 것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감정을 못 느끼니까요."


쏴아아. 잠깐의 적막도 유지하기 힘들다 칭얼대는 것처럼, 파도소리가 남자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여자의 시선이 다시 조개껍데기로 향했다.


"당신 눈에는 이게 예쁘다고 했죠? 여기 널려있는 모래와 다른가요?"


"네."


"그럼, 이건 특별한 거예요?"


"그렇죠. 처음엔 생긴 게 눈길을 끈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와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네요."


"뭐가 달라졌는데요?"


"내가 당신에게 주었고, 이젠 당신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두 사람의 눈이 만났다. 착각인가. 아주 잠깐, 남자는 그녀의 눈이 흔들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과 미소를 간직한 채 말을 이었다.


"처음에 이 조개껍데기가 눈에 띈 것도, 내 마음속에 당신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 말은, 방금 당신이 한 일련의 행동의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건가요?"


"하하,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당신에게 조개껍데기와 모래가 다른 건, 단백질과 이산화규소의 차이보다(각각 조개껍데기와 모래의 구성성분. 조개껍데기의 주요 구성성분은 탄산칼슘이고, 모래에 두 번째로 많은 성분 또한 탄산칼슘이다.) 날 떠올리게 하느냐 아니냐란 거고요?"


"네, 바로 그거예요."


"조개껍데기가 예뻐서 주웠다 했는데, 그럼 당신이 보기엔 내가 예쁜가요?"


흡. 남자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당연한 질문을 받으니 되려 머뭇거리고 말았다.


"... 물론이죠."


그는 조심스레 여자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이런 조개껍데기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당신은 아름다워요."


헤에. 여자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 틈으로 반론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치만 나나 이 조개껍데기나 별 모두, 우주적 관점에선 모래와 다를 바 없는걸요.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화학적 결합으로 지금은 다른 구조와 형태를 띠고 있을 뿐, 모든 것은 우주에 균질되게 분포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으니까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의 증가로군요.. 맞아요. 끝에 형태를 가진 모든 건 스러지고 흩어지고 말겠죠. 여기나 저기나 아무 차이가 없는 상태가 되어, 균등한 확률 외에는 아무 의미도 남지 않은 세상이 될 거예요.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우리 입장에선 무구한 세월일 테지만, 우주에게는 그 또한 아무 의미도 없을 테고요."


"네. 인간이 세운 모든 지식과 관념은 하나의 진리만 남기고 다 사라질 거예요."


"... '유(有)는 무(無)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요."


결국 우린 무엇 하나 남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당신을 향한 이 사랑마저 무의미해진단 말인가?

남자는 이 뜨거운 물음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그럼 지금 끝내도 무관하지 않을까요."


여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응시했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꼭 쥐고서, 일부러 농담하듯이 말했다.


"밤이라 물이 많이 차가울 텐데요."


"상관없어요."


"난 있어요."


"들어가는 건 난데, 당신이 왜요?"


"당신을 구하러 뛰어들 거니까요."


"그냥 두면 안 돼요?"


"안 돼요."


"어째서요?"


"... 알잖아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떨림이 묻은 남자의 목소리와,


"난 사랑의 감정을 몰라요."


한치의 동요도 없는 여자의 목소리.


이런 전개. 이렇게 되리란 것쯤, 남자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붙잡아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닐까.


"... 어쩌면 우리가 아직 모르는 뭔가가, 열역학 제2법칙을 뒤집어엎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꼭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처럼 들리네요."


남자는 씩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지금과 같은 우주의 유지를 바라는 존재가 있다면..."


별을 가득 담아 온 부드러운 눈길이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아마도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겠죠."






어둠 위를 수놓은, 아직은 불균등한 하얀 군집.

점점 넓고 얇아진 군집들은 결국 고르게 퍼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끝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

잠시 후, 어떤 존재의 강력한 의지가 작동하였다.


흑과 백이 하나처럼 꼭 달라붙은 그곳을 열을 품은 노란빛이 가로질렀다.

이어서 초록이 파릇파릇 자리를 잡고, 갈색이 굳건한 심지가 되며, 선명한 주황빛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물살을 견뎌낸 탱글함, 육지의 풀을 뜯고 자란 살과, 그 살과 피를 먹고 자란 살이 이 이상은 번성할 수 없겠다 싶은 그때.


비로소 끝과 시작이 하나로 만나며 완성을 이루었다.



스스로의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수고로움을 견뎌내고 질서를 세운 손.

그것은, 사랑.





탁!


"아야!"


"그만 좀 주워 먹어 이것아! 재료 모자라."


김밥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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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作). 아름다운 은하수 밑 해변, 모래사장에서 예쁜 조개껍데기를 발견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하는 장면. 남자는 조개껍데기에 사랑을 담아 섬세히 건네고 있으나, 감정을 못 느끼는 여자에게는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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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게인,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作). '우주의 의지', 즉 '사랑'이 담긴 김밥과, 정성스레 김밥을 싸던 중 김밥 재료를 몰래 집어가는 손을 발견한 어머니, 그리고 훔쳐먹다 맞는 아들의 모습 위로 손을 꼭 잡은 남녀가 아름다운 밤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모든 것은 '살롱 드 아무말'의 이장님이신 '마봉 작가님'의 뜻대로.

(책임 회피인 듯 회피 아닌 회피 같은 나아~)


이미지 감사합니다, 마봉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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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글이 태어날 수 있도록 깊은 영감을 주신 '더블윤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명 깊게 읽은 작가님의 글은 여기 아래에. (필독입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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