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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의 아키텍처

by 김경훈


우리는 정의(定義) 내리기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도서관을, 우리가 만든 작은 분류표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다. ‘이것은 이것이다.’ ‘저것은 저것이 아니다.’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아군과 적군, 그리고 건축과 토목. 우리는 이 견고한 ‘뚜껑’들을 씌움으로써 비로소 안도한다. 이 혼돈스러운 우주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질서를 부여했다고. 깔끔하게 분류된 서가(書架)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워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언제나 그 분류표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서 혹은 그 틈새에서 자라나는 예외들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뚜껑이 있는 것’과 ‘뚜껑이 없는 것’이라는 거대하고 단순한 이분법에 감탄하지만, 정작 그 둘 사이를 관통하며 존재하는 ‘터널’이나 ‘지하철’의 존재 앞에서는 당황한다. 뚜껑은 분명히 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건축이라 부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예외적인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타인이 씌워놓은 ‘뚜껑’이라는 본질(Essence)과, 그 뚜껑을 부수고 나아가려는 ‘터널’이라는 실존(Existence)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존재들. 이것은 그 뚜껑과 터널의 경계에 서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사유하게 된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맑은 가을날의 기록이다.



1. 출발이라는 이름의 시스템


동대구역 플랫폼은 서울로 향하려는 인간들의 들뜬 에너지와, 방금 도착한 KTX 열차가 내뿜는 차가운 금속성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연인, 보보의 손을 잡고 그 소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세상을 향한 따뜻하고 호기심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 모든 분주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훈련된 전문가의 풍모를 풍기는 안내견 탱고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12호 차, 이쪽이 맞네.”


보보가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녀는 철학 박사였지만, 이런 실용적인 순간에는 누구보다 명민하게 시스템을 파악했다. 그녀는 가벼운 트렌치코트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15년 전 김경훈의 시각적 기억 속에 저장된, 지적인 큐레이터의 이미지와 정확히 겹쳐졌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 톤과,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설렘,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는 특유의, 오래된 책과 달콤한 과일 향이 섞인 냄새로 그녀의 표정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디지털 인문학의 미래’라는 이름만 들어도 하품이 나오는 학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건 공식적인 이유였다. 김경훈이 연구 모드로 딱딱한 발표를 하는 동안, 보보는 인사동의 갤러리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두 사람의 진짜 목적인 ‘앙가주망’—두 사람이 좋아하는 재즈 바에서의 비싼 칵테일과 깊은 대화—이 예정되어 있었다.


“특실 좋네.”

자리에 앉으며 그가 말했다. 좌석은 넓었고, 공간은 쾌적했다. 탱고도 그의 발치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KTX 특실의 음향적 질감을 정확히 감각했다. 일반실의 왁자지껄한 소음 대신, 낮게 깔린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규칙적인 바퀴 소음이 두꺼운 벽과 카펫에 적절히 흡수되어 만들어내는 안정적인 백색 소음.


열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동대구역을 출발했다.

“아, 맞다. 자기야, 이거 봐.”

보보가 자신의 아이폰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어제 유튜브에서 본 숏폼인데, 너무 웃겨. 세상에, 건축이랑 토목을 구분하는 법 이래. 뭔지 알아?”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위트가 넘쳤다. “글쎄. 돈이 많이 드는 쪽이 토목인가?”


“아니야, 아니야.” 보보가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더 단순해. ‘뚜껑이 있으면 건축이고, 뚜껑이 없으면 토목’이래. 아파트, 건물, 집은 건축. 도로, 다리, 댐은 토목. 완벽하지 않아?”


김경훈은 그 단순하고도 오만한 정의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거… 그거 완벽한 정의가 아니라, 완벽한 함정인데.”

“딩동댕! 역시 김 박사. 댓글이 난리가 났지. ‘그럼 지하철은요?’, ‘터널은요? 뚜껑 있는데?’”

“당연하지.” 김경훈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그는 어느새 ‘연구 모드’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건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현상에 대한 게으른 분류일 뿐이야. 핵심은 뚜껑의 유무, 즉 ‘형태(Form)’가 아니지. 그 존재의 ‘기능(Function)’과 ‘목적(Purpose)’이지.”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럴 때면, 보이지 않는 칠판에 판서를 하는 깐깐한 철학 교수처럼 보였다.

“건축은 인간이 그 안에서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을 만드는 거야. 그 뚜껑은 비바람을 막고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한, 인간 중심적인 목적을 가지지. 하지만 토목은? 그건 ‘인프라’야.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고, 자연의 힘(물이나 흙)을 ‘제어’하는 시스템이지. 터널의 뚜껑은 거주를 위한 게 아니라, 산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뚫고 지나가기 위한, 순수한 기능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보보는 그의 명쾌한 분석에 감탄한 듯,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경훈이 결론을 내렸다. “터널은 뚜껑이 있지만 건축이 아닌 게 아니야. 애초에 ‘뚜껑’이라는 변수 자체가 그 둘을 구분하는 올바른 기준(Key variable)이 아니었던 거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 거지.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 하나를 붙잡고, 그게 전부라고 착각한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 논의가 자신과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뚜껑’(시각의 부재)이라는 가장 눈에 띄는 형태만을 본다. 그리고 그 뚜껑으로 그의 존재 전체를 정의하려 든다. ‘시각장애인 연구원.’ 그들은 그 뚜껑이 그의 기능과 목적을 제한할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의 진짜 기능은 그 뚜껑 때문에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그는 ‘보는’ 대신 ‘듣고’, ‘만지고’, ‘기억하고’, ‘연결한다’. 그는 뚜껑이 닫힌 건물이 아니라, 그 뚜껑 아래를 맹렬히 관통하며 나아가는 ‘터널’과 같은 존재였다.



2. 터널이라는 이름의 세계


그들의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KTX가 긴 터널 속으로 진입했다.

‘콰아아아-’

열차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실내의 모든 감각 정보가 극적으로 재편되었다.


창밖의 밝은 가을 풍경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객실의 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승객들의 피로한 얼굴들이 검은 유리창 위에 유령처럼 떠올랐다. 보보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김경훈의 세계는 정반대였다. 그에게 시각 정보의 차단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대신, 그의 청각 세계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터널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공명(Resonance). 열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저주파의 굉음이 객실 전체를 감쌌고, 그 굉음의 파도 위로,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들이 날카롭게 떠올랐다.


그는 들었다. 두 줄 앞자리에서 누군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아마도 급한 보고서를 쓰는 직장인이겠지. 키압이 높고 초조하다). 복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이어폰 밖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K-Pop의 비트 소리.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서 보보가 책장을 넘기는 종이의 건조한 마찰음과, 그녀가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는 미세한 숨소리까지도. 터널 안에서 그의 세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압축되고 증폭되어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이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이것은 15살에 그가 처음으로 들어선, 영원한 터널의 감각과도 비슷했다. 세상의 빛이 꺼졌을 때, 그는 소리와 냄새와 질감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터널 속에 갇힌 것이 아니었다. 그는 터널을 통해, 세상의 또 다른 차원에 접속한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옆자리의 보보의 손을 찾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자기야.” 그가 나지막이 불렀다.

“응?” 그녀가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우리, 완벽한 토목공학의 한가운데에 있네.”

“무슨 소리야?”

“터널 안이잖아. 이 어둠, 이 소리.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거대한 산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어.”


그의 말에, 보보가 마침내 책을 덮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의 감각을 이해하려는 깊은 공감이 어렸다.

“어때, 당신한테는? 밖이랑… 많이 달라?”

“완전히 다르지.” 김경훈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당신들 ‘보는’ 사람들에게 터널은 그저 풍경의 단절, 잠시 거쳐 가는 공백이겠지만, 나에게는… 이 안이 훨씬 더 시끄럽고, 훨씬 더 촘촘해. 모든 감각이 이 좁은 공간 안에 압축된달까. 마치… 세상의 혈관 속에 들어와, 그 맥박 소리를 직접 듣는 기분이야.”


그는 15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동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의 그 fleeting(순식간의) 어둠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저 불편하고 지루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터널이 단순한 ‘통과’의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임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말을 이었다. “나라는 존재도 그런지도 몰라. 사람들은 내 뚜껑(장애)만 보고, 내가 ‘단절’된 세계에 산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들은 모르지. 내 터널 안이 그들의 세상보다 훨씬 더 시끄럽고, 복잡하고, 때로는 더 생생한 감각들로 가득 차 있다는 걸.”



3. 비대칭의 아키텍처


보보는 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듯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터널의 굉음 속에서도 이상하게 명료하게 들렸다.


“그래서 우리 관계는 뭔데, 김 박사?” 그녀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나는 뚜껑도 있고, 그 안에서 살기도 하니까 ‘건축’이지. 당신은 방금 스스로 ‘터널’이라며. 그럼 건축과 토목의 만남인가? 이거 완전 이종(異種) 간의 사랑인데. 꽤 로맨틱하네.”


김경훈은 그녀의 재치 있는 비유에 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터널의 소음을 뚫고, 그들만의 작은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는 유쾌함과 재치를 빌려, 그녀의 질문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이종? 무슨 소리. 우린 완벽하게 상호보완적인 시스템이지. 당신은 내가 잃어버린 15년의 시각적 세계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최고의 ‘인터페이스’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 감촉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글쎄, 나는 당신의 그 복잡한 철학적 세계에 가끔 딴지를 걸어주는 귀찮은 ‘버그 리포트’ 정도 되려나?”


“버그 리포트?” 보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웃기지 마. 당신은 버그가 아니야. 당신은 내 시스템 전체를 재부팅시키는 가장 강력한 ‘패치(Patch)’지.”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부드러운 향기가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 좁고 어두운 터널 안에서 두 사람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여보.” 보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까 그 ‘뚜껑’ 이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이 많은 남자랑 어린 여자가 사귀는 건, 왜 그렇게 꼴 보기 싫은 ‘건축’처럼 느껴질까? 낡고 위험한 불법 건축물 같달까. 근데 나처럼 나이 많은 여자랑 당신처럼 어린 남자가 만나는 건, 왠지 좀… 괜찮은 ‘토목’ 공사 같지 않아?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 같은 느낌?”


김경훈은 그녀의 엉뚱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얼마 전 보보와 차 안에서 나누었던 ‘비대칭 로맨스 각본’에 대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거야말로 완벽한 고정관념이지.” 그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거기서도 ‘힘의 불균형’이라는 낡은 뚜껑만 보는 거야. 남자의 경제력과 여자의 젊음이라는 교환 가치. 하지만 그 뚜껑 아래에서 어떤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내밀해졌다.

“그들이 모르는 건, 나라는 터널이 당신이라는 건축물을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당신이라는 단단하고 따뜻한 건축물이 나라는 터널을 통과함으로써 얼마나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는지. 그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 아닐까.”


그의 말에 보보는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조용히 힘을 주었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그의 등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그것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확실한, 존재의 증명이었다.



4. 빛, 그리고 지상의 아키텍처


‘콰앙-’

열차가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갑작스러운 빛의 범람과 함께, 터널 속에서 팽창했던 소리의 세계가 순식간에 재편되었다. 창밖으로 가을의 풍경이 다시 펼쳐졌지만, 김경훈의 귀에는 방금 전까지 들렸던 그 강렬한 소리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울역에 도착했다. 역사(驛舍)의 거대한 아치형 지붕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김경훈은 탱고의 하네스를 단단히 잡고, 이 거대한 공간의 소리 풍경에 귀 기울였다. 모든 방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안내 방송, 대화 소리들이 높은 천장에 부딪혀 하나의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야, 저길 봐.” 보보가 그의 팔을 끌며 속삭였다. “저 천장 좀 봐. 거대한 ‘뚜껑’이네. 그럼 여긴 건축이야, 토목이야?”


김경훈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여긴 둘 다야, 보보.” 그가 말했다. “이곳은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건축)이자, 동시에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시스템(토목)이 만나는 곳이지. 터널과 건물이 기능과 형태가 비로소 하나가 되는 ‘합(Synthesis)’의 공간이야.”


그는 자신의 삶을 생각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뚜껑(본질)과, 그 한계를 뚫고 나아가려는 ‘연구자’라는 터널(실존). 그는 더 이상 그 둘 중 하나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 서울역처럼, 그 두 가지가 공존하고, 부딪히고, 때로는 아름답게 조화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였다. 그는 ‘시각장애인 연구원’이라는 분류표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저, 김경훈이었다.



5. 가장 확실한 실존


그날 저녁, 학회 일정을 모두 마친 그들은 종로의 한 허름한 뒷골목, 보보가 기어코 찾아낸 ‘뚜껑이 있는’ 작은 한옥 식당에 앉아 있었다. 낮은 처마 아래, 작은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공기 중에는 짭짤한 간장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그래서” 보보가 막걸리 잔을 채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늘의 결론은 뭐야, 김 박사? 우리는 건축이야, 토목이야?”


김경훈은 그녀가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유쾌하고도 깊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글쎄.” 그가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그런 건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사람이 어쩌면 그래?’라는 질문에 ‘사람이라 그래’라고 답하는 것처럼, ‘이건 건축이야, 토목이야?’라는 질문의 답도 그냥 ‘이건 이거지’ 아닐까.”


그는 막걸리 한 모금을 넘겼다. 알코올의 짜릿한 온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중요한 건, 뚜껑이 있든 없든, 내가 지금 당신과 함께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지.”


그는 아이폰을 꺼내, 오늘의 길었던 여정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뚜껑의 패러독스, 혹은 존재의 우선권.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을 ‘뚜껑’(형태/본질)으로 분류하려 하지만, 세상의 진실은 종종 그 뚜껑을 관통하는 ‘터널’(기능/실존)에 있다.

나의 장애는 뚜껑이지만, 나의 삶은 터널이다.

결론: 모든 정의는 결국 폭력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분류가 아니라, 그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보보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탱고에게 그러하듯이.’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보보가 그의 잔에 다시 막걸리를 채워주었다. 시끄럽고, 불완전하며, 정의 내릴 수 없는 세상.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닿는 그녀의 온기만큼은 그 어떤 철학보다도 확실하고 따뜻한 ‘실존’의 증거였다. 그는 그 증거를 향해, 다시 한번 유쾌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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