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감(Empathy)이라는 단어를 숭배한다. 그것을 21세기의 가장 고결한 미덕으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라. 우리는 이 고상한 격언을 성서처럼 되뇌며, 마치 그것이 인종, 계급, 젠더, 그리고 장애라는 이름의 모든 갈등을 해결할 마법의 열쇠라도 되는 듯 간절히 믿는다. 우리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마침내 그와 하나가 되어, 그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정확히 나눠 짊어지기를 꿈꾼다.
그러나 만약, 그 숭고한 욕망 자체가 가장 오만한 형태의 지적 정복욕이라면 어떨까. 내가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그 잔인하고 명백하며, 결코 건널 수 없는 존재의 심연이야말로,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라면 어떨까.
어쩌면 진정한 공감이란, 타인의 고통을 10분짜리 VR 체험처럼 손쉽게 시뮬레이션하고 ‘아, 나 이제 그거 알아!’라고 선언하는 값싼 관광(Tourism)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차라리, 내 신발을 벗어 든 채 그 사람의 낡은 신발 옆에 나란히 서서, 우리가 결코 같은 신발을 신을 수 없다는 그 아득한 거리를, 그 존재의 고유한 영토와 역사를, 가만히,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해 주는 행위일지도.
이것은 그 경계의 의미를,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처절하게 이해하며 살아온 한 남자가 자신의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선언한 한 젊은 영혼과 마주한, 어느 늦가을의 기록이다.
1.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오만
대학교 복지관 1층의 프랜차이즈 카페는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 식지 않은 점심 메뉴 냄새와 값싼 원두의 탄 냄새, 그리고 젊은 지성들이 내뿜는 특유의 낙관적인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경훈은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맞은편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젊은 학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는 유쾌하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올해 4학년이 되어 졸업 프로젝트 때문에 그를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 문헌정보학과의 이유진 학생이 앉아 있었다. 유진은 총명하고, 열정적이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녀의 맑고 높은 목소리는 쉼 없이 울렸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한 핸드크림 향기가 김경훈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흥분하면 손에 쥔 볼펜을 연신 ‘딱, 딱, 딱’ 하고 누르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볼펜 소리는 마치 기관총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래서, 선배님!” (그녀는 그를 교수님이라 부르다, 격의 없이 대해도 좋다는 그의 허락에 신이 나서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제 졸업 프로젝트 주제는 ‘공감을 위한 인터페이스 디자인’입니다. 기존의 장애인용 앱이나 시스템은 너무 차갑고 기능적이에요. 저는… 저는 진짜 ‘이해’를 담고 싶어요.”
김경훈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ENFJ적인 성향은 이 학생의 순수한 열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공감이라.”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주… 거창하고 멋진 단어네요, 유진 씨. 모 작가가 들으면, ‘그게 돈이 됩니까?’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그래서, 그 ‘공감’을 어떻게 인터페이스에 담을 생각인데요?”
그의 짓궂은 농담에 유진의 뺨이 살짝 붉어지는 듯했다. (김경훈은 그녀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지는 것으로 그것을 감지했다.)
“그, 그게 핵심이에요! 저는…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겪을 감정의 곡선까지 설계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 사용자가 길을 잃었을 때, 시스템이 단순히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차가운 기계음을 내뱉는 게 아니라….”
“대신, ‘어이쿠! 길을 잃으셨군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뭐, 이런 건가요?”
김경훈의 장난스러운 추임새에 유진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동정이죠! 저는 동정이 아니라 진짜 ‘이해’를 말하는 거예요.” 그녀가 볼펜을 더 세게 눌렀다. “저는… 선배님 같은 분들이 느끼는 세상을, 그 감각을, 비장애인들이 단 10분이라도 ‘정확하게’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환경을 먼저 구축할 거예요. 그 경험이 있어야만, 진짜 공감에서 우러나온 디자인이 가능하다고 믿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인류의 오랜 난제인 ‘타자(他者)의 이해’라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쥐었다고 믿는 듯했다. 김경훈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옅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15년 전의 기억,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병원의 차가운 흰색 천장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 총명하고 열정적인 학생이 ‘이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위험한 영토에 발을 들이려 하는지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는 그저, 그녀가 크게 다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2. 48시간의 지옥, 그리고 ‘완벽한 이해’의 선언
몇 주가 흐른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김경훈은 연구실에서, ‘국가 도서관 데이터 상호운용성 표준안’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잠이 쏟아지는 보고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온통 XML 스키마와 메타데이터의 논리적 구조로 가득 차, 전형적인 ‘연구 모드’ 상태였다. 탱고는 그의 책상 밑에서, 주인의 지루한 노동에 동참하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의 아이폰이 다급한 진동과 함께 울렸다. 이유진이었다.
“선배님! 선배님, 저예요! 저, 저 해냈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는 평소의 맑은 톤이 아니었다. 그것은 흥분과 탈진, 그리고 무언가 엄청난 것을 겪어낸 사람 특유의 격앙된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오, 유진 씨. 뭘 그렇게 해냈어요? 드디어 공감 코딩이라도 성공했어요?”
“네! 네! 바로 그거예요! 선배님… 저 드디어… 드디어 선배님을 이해하게 됐어요!”
김경훈의 미소가 얼굴 위에서 얼어붙었다. 연구실의 공기가 순간 1도쯤 낮아지는 듯했다.
“... 그게, 무슨 말이죠?”
유진은 봇물 터진 듯 자신의 ‘실험’에 대해 쏟아냈다. 그녀는 지난 주말, 꼬박 48시간 동안 의료용 안대를 착용하고, 귀마개까지 한 채 자신의 원룸에 스스로를 감금했다고 했다.
“처음 몇 시간은 괜찮았어요. 그냥 좀 답답하다, 정도였죠. 그런데 밤이 되니까… 선배님, 저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완벽한 암흑 속에서, 소리까지 차단되니까 제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냉장고 문을 열려다 밥솥을 엎지르고, 화장실에 가려다 벽에 머리를 박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라면 하나를 끓여 먹으려다 손등에 뜨거운 물을 쏟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흥분이 아닌, 감격의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저 정말 지옥을 봤어요. 선배님이… 선배님이 매일매일, 20년 넘게 이 지옥 속에서 살아오셨다는 걸 생각하니까… 정말… 정말 존경스럽고… 제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틀 만에 저는 완전히 망가졌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선배님이 느끼는 그 절망감, 그 고독, 그 공포. 저 이제 정말 다 알 것 같아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위대한 발견과 공감 능력에 스스로 감동한 듯했다.
김경훈은 수화기를 쥔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늘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의 얼굴은 지금 핏기 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에게 그 ‘48시간의 지옥’은 모욕이었다.
그는 15살에 그 지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3년을 버텼다. 그는 그곳에서 울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 소리의 질감, 공기의 밀도, 바람의 방향, 손끝으로 전해지는 모든 사물의 고유한 주파수를. 그는 절망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경영학, 경제학, 철학, 문헌정보학을 공부하며 자신의 뇌를 재설계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세웠다. 그는 사랑에 빠졌고, 농담을 던지며, 사람들을 웃게 했다. 그는 20년 동안, 절망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어린 학생이 고작 48시간짜리 ‘불편 체험’을 하고 와서는 감히 자신의 20년짜리 삶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심지어 그것을 ‘절망과 공포’라는 단어로 멋대로 재단하고 ‘존경한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오만이자, 가장 잔인한 형태의 대상화였다.
3. 타인의 구두, 그리고 경계의 철학
“... 선배님? 왜, 왜 그러세요? 제가 뭐 잘못…?”
자신의 감동적인 고백에 뒤따른 긴 침묵. 유진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경훈은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차갑게 나갈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학문적 조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였다.
“유진 씨.”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평소의 유쾌한 ENFJ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서늘한 분석과, 존재를 침범당한 자의 차가운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당신이 한 건… 공감이 아니에요. 그건 ‘체험 관광’이죠.”
“네? 서, 선배님…?”
“당신은 48시간 동안, 내 세상이 아니라 ‘유진 씨의 세상’에서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당신은 그 안대를 벗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걸, ‘비상구’가 있다는 걸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죠. 그건 공포 체험이지, 삶이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은 비상구가 없어요. 이게 내 현실이니까.”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탱고가 그의 긴장을 감지하고, 책상 밑에서 일어나 그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당신은 ‘타인의 신발을 신어봐야 한다’는 말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내 신발을 신은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내 신발을 어설프게 흉내 낸 싸구려 장난감 구두를 신고, ‘아, 이거 엄청 불편하네! 이걸 신고 어떻게 걸어 다녀?’라고 소리친 것과 같아요. 나는 이 신발을 신고 20년 동안 걷는 법을, 뛰는 법을, 심지어 탱고와 함께 춤추는 법까지 익힌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지금, 한때 그가 꿈꿨던 ‘심의(心醫)’로서, 이 상처받은 영혼(민준이 아니라 유진 자신)에게 가장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했다.
“유진 씨. 그게 진정한 '같은 인간'이지요.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어요. 당신은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게 팩트예요.”
그는 어떤 소설의 현자가 되기로 했다. 가장 날카로운 논리로, 그녀의 오만한 환상을 깨부수기로.
“당신, 당신을 지도하는 이 교수님 자리에 대신 앉을 수 있어요? 당신의 가족, 당신의 추억, 당신의 사랑, 당신의 과거의 소중한 것을 모두 팽개치고, 이 교수의 자리에 대신 들어가라면,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럴 수 있어요? 이 교수의 배우자를 당신 남편이라 부르고, 그 자식들을 '내 아들아', 혹은 '딸아', 이렇게 부를 수 있어요?”
“…….”
“못하죠. 그건 당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거니까.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의 그 안대는 내게 48시간의 ‘암흑’을 선물할지는 몰라도, 내 15년의 ‘시각적 기억’과, 그 기억을 바탕으로 20년간 재구축한 나의 ‘감각 세계’를 단 1초도 선물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내 절망을 체험한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의 공포를 체험했을 뿐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당신이 정말 나를, 내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면… 안대를 쓰고 골방에 틀어박힐 게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면서, 그냥 내 이야기를 물었어야죠. ‘당신은 어떻게 세상을 보느냐’고. ‘당신이 보는 세상은 어떤 색깔이냐’고. 당신이 ‘모른다’는 것을, 당신이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거기서부터가 진짜 공감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연구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탱고가 그의 무릎에 턱을 괴고,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경훈은 떨리는 손으로 탱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방금,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에게,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4. 경계에서 시작되는 진짜 대화
그날 저녁,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기 아래에 섰다. 뜨거운 물줄기가 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유진에게 내뱉었던 자신의 차가운 말들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 역시, ‘공감’에 실패한 것은 아닐까.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짓밟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왔을 때, 보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실크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평소의 장난기 대신, 그를 기다리는 조용한 염려가 서려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자기?” 그녀가 반말로, 그러나 누구보다 다정하게 물었다. “오늘따라 당신, 어떤 소설 마지막 장에 나오는 모든 걸 잃은 주인공 표정인데.” (그것은 이제 두 사람 사이의 익숙한 농담이자, ‘깊은 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김경훈은 그녀의 옆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에게서 와인 향과, 그녀 본연의 따뜻한 살 냄새가 났다. 그는 낮에 있었던 일을, 유진의 순수한 오만과, 자신의 잔인한 정직함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내가… 너무 심했을까?” 그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이도 상처받았을 텐데. 나도 결국, 내 ‘본질’을 침범당했다고 느껴서 발끈한 것뿐인지도 몰라. 똑같이 유치하게.”
보보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뉘었다.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애네.” 보보가 퉁명스럽게, 그러나 따뜻하게 말했다. “지가 48시간 겪은 ‘공포’랑, 당신이 20년 넘게 치열하게 ‘살아온’ 삶이 같다고 생각하다니. 철학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그건 공감이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 중독이지.”
그녀의 손길과 목소리에, 그의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그래도… 걔도 상처받았을 거야.”
“상처 좀 받으면 어때.” 보보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끔은 그렇게 벽에 세게 부딪혀 봐야, 자기가 얼마나 오만한지 깨닫는 거야. 당신은 걔한테 ‘틀렸다’고 말해준 게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 거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방식으로, 당신의 ‘실존’으로 걔한테 딴지를 건 거잖아.”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당신이 될 생각 같은 거 1도 없는데. 나는 ‘김경훈’이라는 나랑은 완전히 다른 이 남자가 그냥 좋은 거야. 당신의 그 잘난 척하는 뇌도 좋고, 가끔 이렇게 바보같이 상처받고 끙끙대는 그 연약함도 좋고.”
그녀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당신의 안대를 대신 써 줄 생각 없어. 대신, 당신이 그 안대를 쓰고도 멋지게 걸어갈 수 있게, 옆에서 같이 손잡고 걸어줄 수는 있어. 그거면 되는 거 아니야?”
김경훈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온기. 이것은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한, 대체 불가능한 ‘타인’의 존재였다. 그는 그녀를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 또한 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이토록 서로를 절실하게 원하고 사랑하는 이유였다. 그들은 서로의 신발을 신는 대신,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법을 택했다.
“자기야.”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아까 민준이가 그러는데, 우리 관계는 건축과 토목의 만남이래.”
“뭐래는 거야, 걔는 또.”
“그런데 말이야.” 그가 짓궂게 속삭였다. “지금은 건축이고 토목이고 다 필요 없고… 그냥, 아주 사적인 시공이 필요한 것 같은데. 뚜껑, 꼭 닫고.”
보보가 그의 배를 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변태. 아까 그 상처받은 ‘심의’는 어디 가고, 웬 음흉한 공사장 인부만 남았네?”
“사람이라 그래, 자기야.” 그가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5. 주석: 경계라는 이름의 문
다음 날 아침, 연구실로 출근한 김경훈은 아이폰을 확인했다. 이유진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화면낭독기를 통해 메일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건조한 기계음이 그녀의 짧은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선배님. 어제는… 제가 정말 죄송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밤새 생각했습니다. 저는 선배님의 신발을 신어보려 한 게 아니라, 제 발에 맞게 선배님의 신발을 멋대로 재단하려 했습니다. 저는 선배님을 이해한 게 아니라, 제 상상 속의 불쌍한 장애인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감동했을 뿐입니다. … 염치없지만, 혹시… 언제가 되든, 선배님의 이야기를 그냥, 관광객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모른다’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김경훈은 메일을 다 듣고, 가만히 창밖을 향해 섰다. 가을 햇살이 그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 그만의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그녀에게 짧은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좋아요, 유진 씨. 밥이나 한번 먹읍시다. 맛있는 걸로. 그리고 다음엔… 내 신발 신어볼 생각 말고, 그냥 당신 신발 예쁜 거 신고 와요. 그럼 돼요.”
그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절망의 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될 수 있는 존중이라는 이름의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