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소리글
기억은 어디에 저장되는가. 우리는 그것이 뇌의 시냅스 회로에, 혹은 클라우드 서버의 이진법 코드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어쩌면 기억이란, 그렇게 고상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차라리, 오래된 동전 표면에 묻은 희미한 손때와, 그 차가운 금속성 냄새와,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의 묵직한 무게감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백 원’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락실의 낯선 우주로 떠나는 입장권이었고, 문방구의 모든 보물을 획득할 수 있는 마법의 열쇠였으며, 때로는 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일곱 살 아이의 양심을 시험대에 올리는 최초의 윤리적 질문이기도 했다.
이제 동전은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이 신용카드와 모바일 페이라는 투명한 데이터로 환원되는 시대. 우리는 편리함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손에 쥘 수 있는 기억의 물질성을, 그 차갑고도 분명했던 무게감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 사라져 가는 감각의 아키텍처에 대한, 어느 늦가을 오후의 따뜻한 회고담이다.
1. 목소리의 귀환, 그리고 80년대의 냄새
김경훈은 자신의 연구실이 아닌, 경북대학교 첨성 카페테리아, 학생들 사이에서 ‘복지관’이라 불리는 소란스러운 공간에 앉아 있었다. 공기는 갓 튀겨낸 돈가스 냄새와 값싼 아메리카노의 산미(酸味), 그리고 수백 명의 젊은 지성들이 뿜어내는 생생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사람들을 향한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는 안내견 탱고가 테이블 아래에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그는 오늘, 아주 특별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글’이라는 필명으로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작가. 김경훈이 이곳 문헌정보학과에 오기 훨씬 이전에, 이 캠퍼스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던 대선배였다. 그는 그녀의 글을 좋아했다. 그녀의 글에는 그녀의 필명처럼, ‘소개 울림이 있는 글, 조곤조곤 이야기 들려주듯 위로가 소리처럼 들리는’ 힘이 있었다.
“혹시… 김경훈 후배님?”
낮고 차분하며, 잘 조율된 악기처럼 울림이 있는 목소리. 김경훈은 즉시 그녀임을 알아차리고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네, 맞습니다! 소리글 작가님,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작았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 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는 희미하고 기분 좋은 파우더 향을 조합해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마도 단아한 단발머리에, 지적인 안경을 쓰고, 부드러운 니트를 입은 웃는 모습이 선한 인상의 여성이리라.
“후배님이라 불러도 되죠?” 그녀가 맞은편에 앉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세상에, 제가 졸업한 지가 언젠데… 학교가 정말 몰라보게 변했네요. 저기 첨성대 모형은 그대로지만, 여긴 완전 다른 곳 같아요.”
그녀의 눈빛은 오래된 앨범을 펼쳐보는 듯, 아련함과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선배님.” 김경훈이 유쾌하게 받아쳤다. “제가 오늘 선배님 글을 읽다가 하마터면 제 과거를 고백할 뻔했습니다.”
“제 글이요? 어떤 글을… 아.” 그녀가 금세 알아차린 듯 작게 웃었다. “그 백 원짜리 이야기요?”
“네. ‘동전이 희미해진다’.”
2. 백 원의 무게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거든요.” 김경훈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짓궂은 그러나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선배님은 ‘아시나요’였죠? 저는… 실명하기 직전이었는데, 그때 인형 뽑기 기기 안에 인형들이 미치도록 갖고 싶었습니다.”
그는 대구의 어느 문방구 앞 풍경을 기억 속에서 불러냈다.
“저도 부모님 지갑에서 몰래 돈을 꺼냈죠. 백 원짜리는 아니었고, 오백 원짜리 몇 개였던 것 같아요. 그때의 그 죄책감이란… 선배님이 형사 아버지 앞에서 바지를 걷어 올리던 그 심정, 저 아주 잘 압니다. 저도 어머니께 들켜서 먼지 나게 맞았거든요. 하하.”
그의 유쾌한 고백에 소리글 작가도 환하게 웃었다.
“어머나, 그랬군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더니, 우리는 같은 학교 피가 맞나 봐요. 도벽의 피가….”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카페의 소음 속으로 기분 좋게 섞여 들었다. 김경훈은 그녀의 글이 왜 울림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극복’이나 ‘성공’ 같은 거대한 담론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시나요’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그 뒤에 찾아온 ‘찢어지는 마음’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사소한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선배님.” 김경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의 얼굴에 ‘연구 모드’의 진지함이 떠올랐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단순히 추억담이 아니라,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가치의 아키텍처’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가치의 아키텍처요?” 소리글 작가가 안경을 고쳐 쓰며, 그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네. 선배님이 말씀하신 80년대의 ‘백 원’은 지금의 ‘백 원’과 기호(Signifiant)는 같지만, 그 의미(Signifié)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때의 백 원은 ‘아시나요’였고, 오락실의 우주였고, 딱지 한 판의 세계였죠. 그것은 ‘경험’과 교환되는 무게를 가진 실체였어요.”
그는 자신의 아이폰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지금의 백 원은 어떻습니까? 마트 카트 보증금, 혹은 온라인 뱅킹 화면 속의 의미 없는 숫자 데이터에 불과하죠. 심지어 1998년도 오백 원짜리는 희소성 때문에 수백만 원에 거래된다고 하더군요. 이건 완전한 가치의 전도(顚倒)예요. 동전의 ‘사용 가치’는 사라지고, ‘교환 가치’나 ‘희소성의 가치’만 남은 거죠. 마치… 내용물은 다 썩어버렸는데, 그 병이 고대 유물이라 비싸게 팔리는 것과 같달까요.”
그의 분석에 소리글 작가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우리는 그저 ‘추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 가치 시스템의 붕괴였군요.”
3. 기억의 외주화, 그리고 로맨스의 온도
“더 무서운 건,” 김경훈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통찰력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동전과 함께,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기억하는 방식이요?”
“네. 선배님은 왜 그 일곱 살의 일탈을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실까요? 아빠의 신문지, 그 짜릿한 맛, 동네를 멀리 돌아오던 그 길까지. 그건, 그 백 원짜리 동전이라는 ‘물질’이 선배님의 죄책감, 쾌락, 공포라는 감정과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동전의 무게와 차가운 감촉이 그 기억의 ‘닻(Anchor)’이 되어준 거죠.”
그는 이 디지털 시대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직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카드로, 스마트폰으로 결제합니다. 감각적인 마찰이 사라졌어요. 모든 경험이 매끄럽고, 투명한 데이터가 되어 서버 어딘가로 그냥 ‘전송’될 뿐이죠. 우리는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검색’할 뿐이죠. 기억을 통째로 외주화 시킨 겁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30년 뒤에, 지금의 일곱 살 아이가 엄마 카드로 결제한 ‘아시나요’의 맛을 선배님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그 아이의 기억 속엔 ‘결제 완료’라는 차가운 기계음만 남아 있겠죠.”
그의 말에 소리글 작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카페 안의 소음이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그때, 그의 아이폰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보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화면낭독기를 켤 필요도 없이 그는 그것이 보보임을 알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글 작가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 ‘외부 기억 장치’께서 호출하 셔서요.”
그가 아이폰을 귀에 대자, 보보의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기야! 나 지금 서울인데, 당신 학교 끝나는 시간 맞춰서 동대구역으로 갈게. 저녁 맛있는 거 사줘!”
“서울은 왜? 당신 오늘 강의 없었어?”
“어, 강의는 쨌지!” 그녀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중요한 ‘임무’가 있었거든. 당신 생일 선물 사러. 10년 전 미시간에서 입었다는 그 촌스러운 겨자색 스웨터, 그거랑 똑같은 빈티지 제품을 드디어 구했단 말이야! 물론… 당신한테 입히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리 집 ‘박물관’에 전시해 두려고.”
김경훈은 그녀의 엉뚱하고도 다정한 선물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따뜻하고 행복한 미소가 가득 찼다.
“와, 보보. 당신 진짜….”
그는 전화를 끊고, 소리글 작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말씀대로네요. 그 시절의 동전은 정말 희미해졌지만, 다행히 저에게는 그 동전보다 훨씬 더 소중한 ‘기억’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4. 0원의 아키텍처
소리글 작가는 그의 표정 변화를, 그 행복의 온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후배님.”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 백 원짜리 동전이 아직도 미워요. 하지만 동시에, 그 동전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날 아빠에게 신문지로 종아리를 맞았던 그 부끄러움, 그 찢어지는 마음. 그 감정이 내 평생 ‘거짓말하지 말자’, ‘정직하게 쓰자’는 나의 글쓰기 원칙이 되었거든요. 그 백 원짜리 동전은 내 인생의 가장 비싼 수업료였던 셈이죠.”
그녀는 창밖의, 이제는 낯설어진 캠퍼스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도 아빠 산소에 갈 때, 그 동전을 들고 가요. ‘아빠, 나 이제 안 울어요. 고마웠어요’ 하고.”
김경훈은 그녀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의 ‘소리글’이라는 필명의 의미를 비로소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의 소리를, 타인을 위로하는 따뜻한 울림의 글로 바꾸어내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가치의 아키텍처. 1998년도 오백 원짜리 동전은 수백만 원의 ‘가격(Price)’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소리글 선배의 그 1980년대 백 원짜리 동전, 그리고 내가 보보에게 받은 그 낡은 스웨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Value)’를 지닌다.
시스템은 가격만을 기록하지만, 인간은 가치를 기억한다.
5. 주석: 희미해진다는 것의 의미
그날 저녁, 그는 연구실로 돌아와, 아이폰을 들어 음성 메모를 남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유쾌함과 함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제목: 동전의 아키텍처,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가치.
소리글 선배는 ‘동전이 희미해진다’고 썼다. 80년대의 백 원은 물질적 실체였고, ‘아시나요’라는 구체적인 경험과 연결되었다. 2020년대의 백 원은 희소성이라는 기호가 덧씌워진 투기 대상이거나, 혹은 결제 시스템 속에서 의미 없이 표류하는 디지털 데이터일 뿐이다.
우리는 기억을 외주화 하며 편리함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빠의 신문지’나 ‘백 원의 무게’처럼, 몸으로 기억하는 감각의 아카이브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그 부끄러운 기억을 ‘극복’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적응’의 재료로 삼아, 자신의 글쓰기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헤겔이 좋아하겠군.)
결론: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고, 즉각적이며, 영원히 저장되는 이 디지털 시대에, 무언가가 ‘희미해진다’는 것의 가치를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희미해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되어 가장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 나의 15년 전 시각적 기억처럼. 그리고 오늘 보보가 선물해 준, 그 촌스러운 겨자색 스웨터의 기억처럼.’
메모를 마친 그는 연구실 한편에 놓인 작은 돼지 저금통을 만져보았다. 그 안에는 언젠가 주머니에서 나온, 이제는 쓸모없어진 수많은 동전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저금통을 흔들었다. ‘찰랑.’ 기분 좋은 금속성 마찰음. 그것은 돈의 소리가 아니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들렸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