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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아키텍처

feat. 오뚝이

by 김경훈


잠. 우리는 이 행위를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달콤한 ‘보상’이자 ‘휴식’이라 믿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 잠은 구원이 아니라 가장 잔혹한 형태의 심판이다. 뇌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무방비한 시간 동안, 낮 동안 억눌렀던 불안과 두려움, 서운함과 울분이 ‘악몽’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되어 우리를 찾아온다. 이 괴물은 귀신이나 괴수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시험지를 채점하는 소리, 나를 비난하던 친구의 목소리, 혹은 끝없이 이어지는 공부방의 형광등 불빛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한다.


우리는 왜 먹어야 하고, 왜 자야 하는가. 이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시스템 자체가 고문이 될 때, 인간은 어디에서 구원을 찾아야 하는가. ON/OFF 스위치가 있어, 이 고통스러운 의식(意識)을 잠시 꺼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그 스위치를 갈망하며, 잠들기 두려운 밤을 홀로 견디고 있는 두 영혼이 어느 늦가을 비 오는 날, 아주 잠시 서로의 어둠을 나누어 짊어진 이야기다.



1. 경계 너머의 도시, 낯선 소음


김경훈은 익숙한 대구를 벗어나,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 서 있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꿈’과 ‘좌절’이 촘촘하게 압축된 동네. 공기 중에는 옅은 비 냄새와, 수많은 고시 식당에서 풍겨 나오는 값싼 찌개 냄새, 그리고 오래된 빌라들이 내뿜는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 낯선 도시의 복잡한 냄새와 소음에 평소보다 조금 더 긴장한 듯한 안내견 탱고가 바싹 붙어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평소의 유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상념이 서려 있었다. ‘오뚝이’. 그가 예비 예수회원으로 지내며, 그 이전에 졸업했던 모교에서 만났던 선배였다. 지금은 마지막 변호사 시험을 준비 중인 수험생.


김경훈은 어젯밤, 그녀가 브런치에 올린 ‘잠들기 두려운 날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아이폰 화면낭독기로 읽었다. 아니, 들었다. 그는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했다. 악몽. 귀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고, 서운했던 친구들이 등장하는 꿈.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묘하게 나쁜 기분. 그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것은 그의 과거이기도 했다.


그는 탱고의 하네스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약속 장소인 작은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불과 몇 년 전, 그를 덮쳤던 지독한 어둠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과거라는 이름의 데자뷔


석사 과정 시절, 그는 지금의 민준이나 유진 학생 못지않게, 어쩌면 그들보다 더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었다. ‘시각장애인 연구자’라는 낯선 본질을, ‘최고의 논문’이라는 실존으로 증명해 내야 한다는 강박. 그는 잠을 줄였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오직 데이터와 논리라는 차가운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때, 그 사건이 터졌다. 스토킹. 처음에는 단순한 호감의 표현인 줄 알았다. 익명의 메일, 연구실 책상 위 놓인 작은 선물들. 하지만 그것은 곧 집요한 집착으로 변했다. 그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상대는 분노로 돌변했다. 그의 동선은 감시당했고, 그의 휴대폰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부재중 전화로 가득 찼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敵)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처음 빛을 잃었을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는 잠들기가 두려워졌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선명한 감각이 그를 질식시켰다. ‘잠들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오뚝이 선배의 그 절박한 문장은 바로 그가 매일 밤 외쳤던 기도문이었다. 그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조여왔고,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그는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신경 안정제를, ‘렉사프로’라는 이름의 항우울제를, 마치 모 작가가 진통제를 비타민처럼 먹듯,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지옥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의 곁을 지켜준 가족,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상담사, 그리고…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를 잠잠해질 때까지 함께 견뎌준, 지금은 그의 연인이 된 보보의 목소리였다.


그는 카페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신은 그 터널을 겨우 빠져나왔지만, ‘오뚝이’ 선배는 지금 그 터널의 가장 깊은 곳을 홀로 걷고 있었다.



3. ‘오뚝이’라는 이름의 실존


카페 내부는 좁았고, 오래된 원두 냄새와 눅눅한 책 냄새로 가득했다. ‘오뚝이’ 선배, 그녀는 창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경훈은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힘이 넘치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던 선배의 목소리. 하지만 지금 그가 들은 목소리는 오랜 수험 생활에 지친 듯, 한 톤 낮아져 있었다.


“후배님? 웬일이야, 네가 신림동까지.”


그녀는 놀란 듯했지만,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경훈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특유의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짧은 커트 머리, 호기심 가득한 눈매, 언제나 당당했던 모습. 하지만 지금 그의 감각에 포착된 그녀는 푸석한 피부(그녀의 목소리 톤에서 유추했다)와, 커피에 절어버린 듯한 지친 숨결, 그리고 애써 밝은 척하지만 그 밑에 깔린 깊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 글 봤어요. ‘잠들기 두려운 날들’.”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애써 지었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 봤냐. 쪽팔리게. 그냥… 넋두리야. 신경 쓰지 마.”


“커피 맛은 좀 어때요?” 김경훈이 뜬금없이 물었다.

“뭐?”

“선배 글 보니까, 매일 다른 카페에서 커피 사 마신다면서요. 커피 맛도 모르면서.”

“야, 너…”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너 놀리러 왔냐? 안 그래도 임대인 아저씨랑 옆집 새끼 때문에 미치겠는데.”


김경훈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안도했다. 아직 그녀의 유쾌함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이거요. 보보가 전해주래요. 선배 주라고.”

“보보 씨가? 이게 뭔데?”

“‘수면의 아키텍처’랍니다.”

“뭐?”

“자기가 제일 아끼는 아로마 오일이랑, 뭐… 숙면에 좋다는 허브티래요. 그 인간, 꼭 그렇게 자기가 아는 단어 다 동원해서 말해야 직성이 풀리잖아요.” 그는 투덜거렸다.


그녀는 쇼핑백을 열어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 그녀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 고맙다고 전해줘.”



4. 같은 인간, 다른 지옥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페 안에는 빗소리와, 커피 머신 소리, 그리고 법전을 넘기는 다른 손님들의 소리만이 가득했다. 김경훈은 소설의 인물처럼, 가장 조심스럽고도 직설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선배. 잠 못 자는 거… 많이 힘들죠.”


그의 질문은 동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지옥을 경험해 본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조심스러운 ‘확인’이었다.


그녀의 방어막이 무너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악몽에 대해 털어놓았다. 시험에 대한 공포,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쌓인 서운함들이 어떻게 매일 밤 그녀를 질식시키는지.

“무서운 건,” 그녀가 말했다. “꿈속의 내가 현실의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거야. 꿈에서조차 쉬지를 못해. 일어나면… 그냥, 잔 것 같지가 않아. 내가 인간인지, 아니면 시험 보는 기계인지… ON/OFF 스위치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다 꺼버리게.”


김경훈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녀의 고통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불안을, 그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배. 내가… 감히 선배의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이 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같은 인간’이라는 관계의 시작일 테니까요.”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석사 시절 겪었던 스토킹, 공황장애, 그리고 항우울제에 의지해야 했던 날들.

“나도 그랬어요. 잠드는 게 지옥이었어요. 눈을 감으면,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그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숨이 막혔어요. 호흡이 안 돼서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죠.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고, ‘렉사프로’를 물처럼 마셨어요. 나도 스위치를 끄고 싶었어요.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경보음을 제발 멈추고 싶었어요.”


그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 모든 고통을 통과해 온 자의 깊은 연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따뜻한 미소가 함께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의 고통을 안다고는 말 못 해요. 선배는 변호사 시험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거고, 나는 그때 또 다른 종류의 벽 앞에 서 있었으니까. 우린 다른 지옥에 있었던 거죠.”


그는 그녀의 손을 찾아, 가만히 잡았다.

“하지만 선배. 이거 하나는 알아요. 그 지옥 같은 터널에도, 아주 희미하지만 끝은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 터널을 혼자 걷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버텨져요.”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5. 주석: 살아있다는 감각


그날 밤, 대구로 돌아오는 KTX 안. 김경훈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차분했다. 그는 아이폰을 꺼내, 주머니에 넣어 진동 모드로 바꾸었다. 그리고 보보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음성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오늘의 이 복잡했던 만남을, 그 자신을 위해 기록해야만 했다.



‘제목: 악몽의 아키텍처, 혹은 살아있다는 감각.

‘오뚝이’ 선배를 만났다. 그녀는 잠들기를 두려워한다. 그녀의 악몽은 그녀의 현실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증명하는 가장 잔인한 보고서다.

그녀는 먹고 자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다. 생존의 필수 요소가 존재의 고문이 되는 역설.

그녀의 고통을 보며, 나의 잊었던 지옥을 떠올렸다. ‘렉사프로’의 금속성 맛, 숨이 막히던 순간의 공포. 우리는 서로 다른 지옥에 있지만, 같은 언어(두려움)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극복’을 말하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그녀는 이미 그녀의 ‘실존’으로 그 벽에 덤벼들고 있었다. ‘앙가주망’.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잠들기 두려운 밤에도 책상에 앉아 꾸역꾸역 법전을 넘기는 그 지루하고도 위대한 행위 그 자체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심의(心醫)’는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는 자가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함께 찾아주는 자여야 한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대신, 나의 고통을 고백했다.

‘내가 당신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형태의 연결(Connection)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지만, 서로의 신발 옆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발이 얼마나 아픈지 이야기할 수는 있으니까.

결론: 그녀는 커피 맛을 모르지만, 매일 다른 카페에 간다. 어쩌면 그녀가 찾는 것은 커피 맛이 아니라, ‘산책’이라는 이름의, 아주 짧은 ‘삶’의 감각일 것이다. 그녀의 악몽이 멈추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 악몽조차도, 그녀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열차가 어둠 속을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잠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참고문헌

https://brunch.co.kr/@fivepoem/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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