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술’을 마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야기’를 마신다. 한 잔의 액체 속에는 그것이 거쳐온 시대의 역사,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규칙,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자의 절박한 욕망이 복잡한 아키텍처를 이루며 용해되어 있다.
특히 ‘소주(燒酒)’라는 기호(Sign)는 지독히도 모순적이다. 그것은 본래 ‘불살라’ 만든(燒) 귀한 증류주였으나, 지금은 고구마와 타피오카로 만든 주정(酒精)에 물을 타 ‘희석’한, 가장 값싼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이 초록색 병의 액체를 마시기 위해 ‘안주(按酒)’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음식을 필요로 한다. 이미 마신 술을 ‘눌러 내리기’ 위해.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역설적인 행위인가. 우리는 취하기 위해 마시고, 깨기 위해 먹는다.
어쩌면 소주는 처음부터 그 자체로 완전한 목적이었던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위한 ‘핑계’이자 ‘변명’이었다. 제사를 위한 약주(藥酒)라는 숭고한 변명, 시름을 잊기 위한 서민의 변명,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과 조금 더 오래 마주 앉아 있고 싶은 나의 가장 솔직한 변명.
이것은 그 수천 년에 걸쳐 정교하게 구축된 ‘변명의 아키텍처’를, 눈이 아닌 혀와 코, 그리고 온몸의 감각으로 해부한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늦가을 밤의 기록이다.
1. 두 개의 시스템
차가운 바람이 대구의 밤거리를 씻어 내리고 있었다. 김경훈은 대학교의 오랜 스승인 이석현 교수의 팔짱을 낀 채, 중구의 한적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낯선 골목의 냄새와 소리 정보를 쉴 새 없이 수집하는 안내견 탱고가 듬직하게 길을 이끌었다.
“허허, 자네 덕분에 이런 호사를 다 누려보는군. 이젠 내가 자네 연구에 자문을 구해야 할 판이야.”
이 교수의 목소리는 낡은 가죽 책 표면처럼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제자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자부심과 온기가 담겨 있었다. 김경훈은 특유의 유쾌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의 입가에는 늘 세상을 긍정하는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교수님, 무슨 말씀을요. 제가 오늘 쏘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은 교수님 연구비 카드로 긁을지도 모릅니다. 모 작가 스타일로 말하자면, 이건 ‘부의 파이프라인’ 구축을 위한, 아주 전략적인 접대입니다.”
“이놈, 여전하구나. 그 입담은.”
이 교수가 껄껄 웃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월영(月影)’이라는 이름의, 안동 소주를 전문으로 하는 한식 주점이었다. 묵직한 고목으로 만든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밖의 차가운 공기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따뜻하고 그윽한 세계가 그들을 맞이했다. 공기 중에는 옅은 약재 냄새와, 고기가 쪄지는 구수한 수증기, 그리고 공간을 은은하게 채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달콤한 누룩 향이 섞여 있었다. 김경훈은 이 복잡한 향기의 아키텍처를 분석하며, 이곳이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잘 설계된 ‘경험’의 공간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룸으로 안내되었다. 잠시 후, 보보가 조금 늦게 도착했다.
“미안, 자기야. 앞의 세미나가 늦게 끝났어.”
그녀는 김경훈의 곁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서는 늦가을의 차가운 밤공기 냄새와, 그녀가 좋아하는 르 라보의 쌉싸름한 홍차 향, 그리고 언제나처럼 지적인 자신감의 냄새가 났다. 그녀는 미국에서 10년을 보낸 철학 박사다운 자유분방함과 그를 향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고, 황 박사님. 여전히 두 분은 보기 좋습니다.” 이 교수가 인자하게 웃었다.
“교수님도 여전하시네요. 정정하셔서 다행이에요.” 보보가 반말로 넉살 좋게 받아쳤다.
주문이 시작되었다. 이 교수는 망설임 없이 이곳의 가장 귀한 술이라는 ‘안동 소주 명인 45도’ 한 병과 ‘돔배기(상어고기)’ 수육을 주문했다.
“교수님, 저건… 너무 독한데요.” 김경훈이 장난스럽게 엄살을 부렸다.
“이 사람아, 술은 원래 그런 맛에 마시는 걸세.”
바로 그때, 김경훈이 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이 기발한 궤변을 생각해 낸 듯한, 짓궂고도 유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요, 이모님. 그리고… 여기 혹시, 그 초록색 병에 든, 제일 싼 소주도 한 병 갖다 주시겠어요? ‘참’이든 ‘진로’든 상관없습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 교수는 “이놈이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보보 역시 “이 남자가 또 무슨 꿍꿍이지?” 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기야,” 보보가 속삭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 공업용 알코올은 왜 시켜? 당신 그 냄새 싫어하잖아.”
“싫어하긴.” 그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이건 ‘연구’를 위한 거야. 아주 중요한 비교 분석 실험이지. ‘전통’과 ‘현대’, ‘본질’과 ‘시스템’에 대한 고찰이랄까.”
2. 혀끝의 아키텍처: 증류(蒸溜)와 희석(稀釋)
곧 두 개의 다른 시스템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하나는 투박하지만 기품 있는 백자 호리병에 담긴, 맑고 투명한 ‘안동 소주’. 다른 하나는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그 선명한 ‘초록색 병’의 희석식 소주.
이 교수가 먼저 안동 소주를 따랐다. 잔을 채우는 소리가 ‘졸졸’이 아니라, 점성이 느껴지는 ‘또르륵’에 가까웠다. 김경훈은 잔을 들어, 코로 가져갔다.
그는 수많은 이미지를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코를 자극한 것은 기억 속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정보’였다.
그것은 ‘향기’였다. 잘 익은 곡식의 단내, 누룩이 발효되며 뿜어내는 복잡한 에스테르 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마치 갓 지은 밥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따뜻하고 깨끗한 증기의 냄새. 그는 15년의 시각적 기억을 더듬어,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날 안동의 다락논 풍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와…” 그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이건… 스토리가 있네요. 쌀이 겪었을 모든 시간이 이 안에 담겨 있어요.”
그는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45도라는 도수가 무색하게, 혀를 감싸는 질감은 부드러웠고, 목을 넘어갈 때는 마치 불이 타오르듯(燒酒) 뜨거웠지만, 그 끝맛은 역설적으로 달았다.
“이게 진짜 술이지.” 이 교수가 만족스럽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김경훈은 잠시 그 여운을 즐기다가 보보에게 초록색 병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딱’ 하는 경쾌하지만 가벼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두 번째 잔이 채워졌다. 그는 다시 코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향기’가 없었다. 대신, ‘냄새’가 있었다.
날카롭고, 화학적이며, 어떤 서사도 거부하는 순수한 ‘알코올’의 냄새. 고구마나 타피오카로 만든 순도 95%의 주정(酒精)이 물과 희석되며 내는 지극히 기능적인 냄새. 이것은 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공장의 이야기였고, 시스템의 이야기였다.
그는 한 모금 마셨다. 혀끝은 쓰디썼고, 목 넘김은 거칠었으며, 오직 역한 알코올 기운만이 코로 치고 올라왔다.
“우웩.” 보보가 작은 잔을 비우고는 혀를 내밀었다. 미국에서 10년을 살았던 그녀에게, 이 희석식 소주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문화 충격이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한국 사람들은 왜 이 쓴 화학약품을 돈 주고 마시는 거야?”
이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돔배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김경훈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다시 유쾌해져 있었다.
“바로 그거야, 보보! 당신은 핵심을 짚었어. 이건 그냥 마시면 안 돼. 이건 ‘안주(按酒)’가 반드시 필요한 술이거든.”
3. ‘안주’라는 이름의 변명
“안주?” 보보가 눈썹을 치켜떴다. “술을 ‘누르기’ 위해 먹는다(按酒)는 그 이상한 개념 말이야? 술이 너무 독해서 음식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미 마신 술을 눌러 내리려고 먹는다고? 그거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니야?”
“비효율적이지.” 김경훈이 웃으며 돔배기 한 점을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야. 이 초록색 병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맛이 없어서 반드시 ‘안주’라는 다른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완전해져. 이건 술이 아니라, 안주를 먹기 위한 ‘기폭제’ 혹은 ‘인터페이스’에 가깝지.”
“마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 같은 연구자들에게 ‘학회’ 같은 건지도 몰라.”
“뭐?”
“생각해 봐. 학회 자체는 지루하고, 발표는 딱딱하고, 밥도 맛없잖아. 그 자체로는 아무 매력이 없지. 하지만 우리는 그 ‘학회’라는 핑계(시스템)가 있어야만, 서울에 올라와서 이렇게 당신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옛 스승님도 뵐 수 있는 거잖아. 이 초록색 병이 바로 그런 거야. 사람들은 술이 마시고 싶은 게 아니야. 그들은 그냥… ‘이유’가 필요한 거지. 사람들과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밤새도록 이야기할 이유.”
그는 보보의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가만히 잡았다.
“어쩌면, 안주가 술을 누르는 게 아니라… 술이 우리의 외로움이나 어색함을 눌러주는 건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 보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이 남자의 머릿속 아키텍처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따뜻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새삼 감탄했다.
4. 몽골군의 전략 물자, 그리고 시스템의 승리
“허허.” 이 교수가 김경훈의 감상적인 결론에 헛기침으로 딴지를 걸었다. “그렇게 낭만적인 이유만은 아닐 걸세, 김 박사. 자네, 이 소주가 어디서 왔는지는 아나?”
김경훈의 ‘연구 모드’가 다시 켜졌다.
“그럼요. 교수님. 이건 ‘전쟁’의 산물이죠.”
이 교수의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이 ‘불사르는 술(燒酒)’의 기원은” 김경훈이 마치 강의를 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이 아니라, 9세기 아랍의 연금술사들이죠. 그들이 와인을 끓이다가 우연히 발견한 ‘땀방울(Arak)’. 그리고 그 기술을 전 세계로 퍼뜨린 건, 칭기즈칸의 몽골군이었고요.”
보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몽골? 몽골군이 이걸 마셨다고?”
“마신 정도가 아니지.” 김경훈이 웃었다. “그들에겐 이게 ‘전략 물자’였어. 알코올 도수가 높아 얼지 않고, 가볍고,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점령지마다 이 증류소(Arak 공장)를 세웠어. 그게 고려 시대로 넘어와, 하필 몽골군이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했던 안동, 개성, 제주에 뿌리를 내린 거예요. 안동 소주의 시작이죠. 지금도 개성 소주를 ‘아락주’라고 부르는 게 그 증거고요.”
이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비웠다. “그래서 이 귀한 술이 어쩌다 저 초록색 병의 화학약품이 되었는가. 그게 문제지. 다 저 일제 강점기 쌀 수탈과, 박정희 정권의 양곡관리법 때문이야. 쌀이 없으니, 고구마랑 타피오카로 주정을 만들고 물을 타기 시작한 거지. 가짜가 진짜를 몰아낸, 슬픈 역사야.”
“과연 그럴까요, 교수님?” 김경훈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논리는 어느 소설의 인물처럼 날카로웠다.
“저는… 그게 ‘가짜가 진짜를 이겼다’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진로(JINRO)’라는 시스템이 시대의 변화에 가장 완벽하게 ‘적응’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는 진로의 역사를 읊기 시작했다. 평안도 ‘진지’의 ‘진(眞)’과 ‘이슬 로(露)’ 자를 따서 만든 민족 기업. 북에서 쓰던 ‘원숭이’ 마스코트를 버리고, 남쪽에서 이미지가 좋은 ‘두꺼비’로 갈아탄 마케팅 감각. 그리고 두 번의 결정적인 정부 정책.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목소리에 경제학도의 분석력이 실리기 시작했다. “1965년, 정부가 ‘쌀로 술 만들지 마!’(양곡관리법)라고 했을 때, 다른 증류소들이 망해갈 때 진로는 가장 먼저 ‘희석식’으로 완벽하게 전환했습니다. ‘본질’(쌀)을 버리고, ‘생존’(주정)을 택한 거죠. 그리고 1976년, ‘너희 동네 술은 너희 동네에서 50% 이상 팔아!’(자도 소주 정책). 이건 완전 불공정 게임이었어요. 가장 인구가 많은 서울/수도권이라는 시장을 독점하게 된 진로는 사실상 정부가 키워준 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초록색 소주병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건 그냥 술이 아닙니다. 이건… 알케미의 발견, 몽골의 침략, 일제의 수탈, 그리고 군사 정권의 산업 정책이 모두 응축된,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입니다. 진로는 술을 판 게 아니에요.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시스템의 빈틈을 정확히 읽어내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취기(醉氣)’를 표준화하고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이건… 시스템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5. 또 다른 변명
그의 거침없는 분석에 이 교수와 보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보보의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자기야.” 그녀가 김경훈의 팔을 쿡 찔렀다. “나 미국에서 들은 얘긴데, 한국 소주병 목이 유난히 긴 이유가 옛날에 학생들이 그걸로 화염병 만들기 쉬워서… 정부에서 일부러 못 만들게 하려고 길게 바꿨다는 게 진짜야?”
김경훈은 그 뜬금없는 질문에,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보보, 당신은 정말… 그건 그냥 야사(野史) 일뿐이야. 근거 없는. 아마 모 작가님이 좋아할 만한, 그런 자극적인 이야기지.”
“왜? 그럴듯한데.” 보보가 억울하다는 듯 반박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병의 아키텍처 자체가 가장 완벽한 ‘판옵티콘’이잖아! 푸코가 말한 보이지 않는 통제! 사람들이 스스로, ‘아, 이건 화염병으로 못 쓰겠네’ 하고 저항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한 설계지!”
그녀의 철학적인 비약에, 이 교수마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황 박사. 그 상상력은 여전하구먼.”
김경훈은 웃음을 거두고, 자신의 손에 들린 초록색 병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그는 15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80년대의 그 뭉툭하고 목이 짧았던 소주병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에 들린, 매끈하고 길게 뻗은 이 병의 감촉을 느꼈다.
그는 보보의 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병은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아라크의 연금술, 몽골군의 야망, 진로의 상술, 그리고 어쩌면, 저항을 억누르려 했던 권력의 의도까지도.
“글쎄.” 그가 잔을 채우며, 보보를 향해 그만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나에게 이 병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야.”
“뭔데?”
“당신이랑 한 잔 더 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하고 이기적인 변명.”
그는 보보의 잔을 채우고, 이 교수의 잔을 채웠다. 세 개의 잔이 각기 다른 역사와 욕망을 담은 채, 11월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6. 주석: 마지막 한 잔의 이유
그날 밤, 아파트로 돌아온 김경훈은 침실에 들기 전,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탱고는 이미 그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아이폰을 들어, 오늘의 이 복잡하고도 취기 어린 사유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음성으로 남겼다.
‘제목: 변명의 아키텍처.
소주(燒酒). 그 기원은 연금술사의 땀방울(Arak)이었고, 몽골군의 전략 물자였으며, 조선 사대부의 약주(藥酒)라는 핑계였다.
현대의 초록색 병은 ‘쌀’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렸지만, ‘대중성’과 ‘시스템 적응’이라는 실존을 획득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이 표준화된 망각을 구매한다.
이것을 마시기 위해 우리는 ‘안주(按酒)’를 먹는다. 술을 누르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은 술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어쩌면 ‘관계’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이 쓴 술이 아니라면, 우리가 이토록 오래 마주 앉아 서로의 맨얼굴을 바라볼 이유가 또 있었을까.
보보는 병목의 아키텍처에서 ‘억압’을 읽었지만, 나는 그 병목이야말로 술이 너무 빨리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읽고 싶다.
결론: 우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변명을 마신다.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당신과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가장 따뜻하고 절실한 변명을.’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내려놓았다. 욕실에서 보보가 그가 좋아하는 ‘딥티크 오 로즈’ 향의 바디워시를 쓰며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이 모든 복잡한 역사와 시스템의 끝에, 결국 남는 것은 이토록 단순하고 따뜻한 ‘현재’임을 깨달았다. 그는 미소 지으며, 그녀가 나올 때까지 소파에 기댄 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