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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정성

by 김경훈

“맛은 없지만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라.”

일상에서 자주 듣는 이 말은 얼핏 따뜻하고 도덕적인 위로처럼 들린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이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모순적이다.

맛이 없다는 사실은 명백한 감각적 실패인데, 그것을 ‘정성’이라는 추상적 미덕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통용되는 사회에는 ‘정성’이라는 말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내재되어 있다.

마치 정성은 맛과 별개로 존재하는, 평가 불가능한 숭고한 가치인 양 취급된다.


하지만 ‘정성’이란 요리자의 노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았는지, 희귀한 재료를 썼는지, 복잡한 조리 과정을 거쳤는지는 ‘수고’일 뿐이다.

그 수고가 정성이 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타인을 향한 감각적 공감’이다.

음식을 먹는 사람이 그것을 맛있게 느끼는지, 씹는 식감은 부담스럽지 않은지, 후각과 미각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섬세하게 상상하고 설계하는 마음.

그것이 정성의 본질이다.


이러한 기준은 시각장애인의 미각 경험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눈이 아닌 혀와 코, 손끝으로 음식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음식은 미각의 ‘현상학’ 그 자체이다.

화려한 플레이팅이나 색감은 정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음식은 철저히 온도와 향, 질감, 맛으로만 구성된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맛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구조적 실패를 뜻한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정성은 있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감각적 진실에 대한 외면이자 역설적으로 ‘정성 없는 요청’이다.


심지어 맛없는 음식에 ‘정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은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정성껏 만들었는데 어찌 남기냐”는 말은, 맛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를 강요하는 태도이다.

이는 진정한 정성의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정성은 타인의 감각을 중심에 두고, 먹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 조용히 사라지는 배려이지, 자신의 노고를 내세우는 감정적 채무가 아니다.

정성은 먹는 이가 그 음식을 맛보며 만드는 이의 수고를 ‘잊을 만큼’ 완성도 높은 결과로 드러날 때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다.


결국 정성은 맛이라는 결과를 통해 증명된다.

맛이 없다면 그것은 정성이 부족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장 정직한 감각적 판단이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노동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맛과 기분, 건강과 취향을 섬세하게 상상하며 그 사람의 하루를 살아보는 일이다.

정성은 그저 ‘열심히 만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감각과 세계에 다가가려는 공감적 노력의 총체이다.

진짜 정성이 담긴 음식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수고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깊은 이해와 배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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