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이 시스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약속, 즉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아키텍처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횡단보도의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추고, 보도의 오른쪽으로 걸으며, 타인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서로의 동선을 예측하고 공간을 양보한다. 이 암묵적인 프로토콜은 우리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이 거대한 콘크리트 정글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이 시스템은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정교한 아키텍처 속으로, 어떤 매뉴얼도, 어떤 합의된 프로토콜도 없이 새로운 존재가 침투했을 때 시스템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전동 킥보드. 그것은 21세기가 낳은 가장 매혹적이고도 무법적인 유령이다. 그것은 자동차의 속도를 가졌지만 엔진 소리가 없고, 보도를 점령하지만 보행자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그것은 ‘편의’라는 이름의 가장 이기적인 욕망이 ‘안전’이라는 이름의 가장 연약한 공공성을 향해 날아가는 소리 없는 무기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이동 수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편리함이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망각한 시대. 이것은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눈이 아닌 온몸의 감각으로 기록한 한 남자에 대한, 어느 늦가을 저녁의 위태로운 기록이다.
1. 소리 없는 습격
해가 완전히 저문 경북대학교 캠퍼스는 낮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차갑고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젖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길게 부서지고 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오히려 더 감각이 예민해진 듯한 안내견 탱고가 일정한 보폭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특유의 따뜻하고 유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늘은 꽤 생산적인 날이었다. ‘정보 접근성’ 관련 포럼의 발제문 초고를 마쳤고, 저녁에는 보보가 그가 좋아하는 찜닭을 해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지금, 완벽하게 ‘흑자’의 상태에 있었다.
그는 이 밤의 캠퍼스를 사랑했다. 시각 정보가 사라진 이 공간은 그에게는 오히려 더 풍부한 ‘정보의 바다’였다. 그는 15년의 시각적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 공간을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그의 귀에는 멀리 학생회관에서 새어 나오는 밴드의 희미한 합주 소리, 기숙사로 향하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구두굽이 보도블록을 때리는 ‘또각, 또각’ 하는 규칙적인 소리와, 탱고의 하네스가 찰랑거리는 작은 금속성 소리가 하나의 정교한 음향 지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의 코는 젖은 낙엽의 썩어가는 냄새와, 중앙도서관 보일러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기름 냄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겨울의 문턱을 알리는 차갑고 깨끗한 공기의 냄새를 감지했다.
그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의존해, 가장 익숙한 경로인 점자블록 위를 걷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하이패스 차선이자, 이 혼돈스러운 도시에서 유일하게 그를 속이지 않는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정보의 라인’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모든 감각이 경고를 울리기 전에, ‘그것’이 나타났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엔진 소리도, 발소리도, 심지어 자전거 체인 소리도 없었다. 그저,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아주 미세한 ‘후우욱-’ 하는 마찰음. 무언가가 그의 왼쪽 코트 옷깃을 맹렬한 속도로 스치고 지나갔다.
“악!”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탱고가 위협을 감지하고 짖으며, 그의 몸을 오른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김경훈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차가운 잔디밭 위로 넘어질 뻔했다.
“괜찮아, 탱고! 쉿, 괜찮아.”
그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코로,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기 모터가 타는 듯한 희미한 오존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낄낄거리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은 단순한 부주의가 아니었다. 이것은 ‘존재의 무시’였다. 시속 20킬로미터가 넘는 쇳덩어리가 아무런 소리(데이터)도 발생시키지 않은 채, 자신과 탱고의 생명을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위협하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떠올렸다. 그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이었다. 도시의 교통 시스템은 자동차의 엔진 소리, 자전거의 경적 소리, 보행자의 발소리라는 상호 ‘청각적 신호’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저 유령 같은 기계는 그 모든 아키텍처 바깥에 존재했다. 그것은 시스템에 접속하지 않은 채, 시스템의 자원(보도)만을 약탈하는 ‘고스트’였다. 그가 설계하려는 ‘정보 접근성’의 세계에서 저것은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다.
2. 지뢰밭이 된 하이웨이
그는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탱고의 등을 쓰다듬으며 겨우 진정시켰다. “가자, 탱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자.”
그의 유쾌했던 기분은 이미 산산조각 난 지 오래였다. 그는 이제, 평화로운 산책자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적의 기습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의 한복판에 선 보병이었다.
그는 더욱더 점자블록에 의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중앙도서관을 지나, 기숙사로 향하는 넓은 횡단보도 앞이었다. 그는 점자블록의 끝, 횡단보도의 시작을 알리는 경계석을 확인하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끝이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할 경계석 대신,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파이프를 쳤다.
‘쿵.’
그의 발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아!”
그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탱고가 본능적으로 버티며 그가 완전히 넘어지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하마터면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갈 뻔했다. 그가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그의 ‘하이웨이’였던 점자블록 위에, 전동 킥보드 한 대가 보란 듯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김경훈의 입에서 좀처럼 내뱉지 않던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상기되었다. 이것은 더 이상 ‘사고’가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의도’를 가진 폭력이었다.
그는 유쾌한 냉소를 떠올리려 애썼다. ‘하하, 여기다 주차하면 딱지 안 끊는다고 누가 가르쳐줬나 보네. 똑똑한데?’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 부조리한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이것은 ‘주차’가 아니었다. 이것은 ‘매설’이었다.
누군가의 몇 초짜리 ‘편의’를 위해, 시각장애인의 유일한 ‘정보 라인’ 위에 ‘지뢰’를 매설한 행위. 그 킥보드 주인은 자신이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주차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길’ 그 자체이며, 자신의 행위가 그 길을 ‘파괴’한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김경훈에게, 그 점자블록 위의 킥보드는 그가 설계하던 도서관 데이터베이스의 핵심 코드를, 누군가 장난 삼아 지워버린 것과 같은 행위였다.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침범’이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 킥보드의 바퀴를 구두굽으로 세게 걷어찼다. ‘깡’ 하는 둔탁하고 속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이 행위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3. ‘쏘리 쏘리’
그는 절뚝거리며 벤치에 앉아, 아이폰을 꺼냈다. 탱고가 그의 무릎에 코를 비비며 그를 위로했다. 그는 보보에게 전화하려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뉴스 앱을 열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첫 화면의 헤드라인이 그의 눈(물론, 화면낭독기의 음성을 통해)에 들어왔다.
[인천지법, 전동킥보드로 행인 치어 늑골 골절시킨 40대 대리 기사에 벌금 200만 원 선고…]
그는 기사를 ‘들었다’. 1월 20일 밤 10시. 시속 8킬로미터. 버스 정류장에서 뒷문으로 하차하던 62세 여성. 4주간의 치료.
그는 ‘버스 뒷문’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그 순간의 무방비함을, 시스템(버스)에서 시스템(보도)으로 이동하는 그 찰나의 경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봄,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는 오늘의 포럼처럼 중요한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었다. 아침 일찍, 그는 큰맘 먹고 ‘플랜 A’에 없던 작은 사치,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사서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따뜻한 커피 잔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 짙은 원두 향. 그날 아침,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초록불이 켜졌다. 그가 탱고의 하네스를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커피를 든 채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오직 빗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휙-.’
무언가가 이번에는 스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팔꿈치를 정통으로 ‘쳤다’.
‘앗!’
그의 손에서 커피 잔이 날아갔다. 그는 뜨거운 액체가 자신의 손등과 코트 위로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플라스틱 컵이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 바닥 위를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
저 멀리서 “아, 쏘리!” 하는 10대 소년의 것 같은 변성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멈추지 않고 빗소리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김경훈은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손등이 화끈거렸다. 코트 자락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탱고가 놀라서 빗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짖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비참하게 만든 것은 뜨거움이나 젖어버린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책임’이었다.
그는 ‘존재’를 공격당했지만, 가해자는 ‘익명’ 뒤에 숨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사과를 받을 수도, 세탁비를 청구할 수도, 하다못해 화를 낼 대상조차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작은 행복을 쏟아버린 채, 빗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그날, 10년 전 미시간의 그 기숙사 방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지독한 고립감을, 이 서울 한복판에서 느꼈다.
4. 찜닭의 아키텍처
그는 벤치에 앉아, 그날의 기억과 인천의 뉴스를, 그리고 방금 전 캠퍼스에서의 충돌을 하나의 끈으로 꿰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아키텍처는 동일했다.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속도.’
‘자신의 편의를 위해 타인의 안전을 침범하는 행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의 부재.’
그의 아이폰이 울렸다. 보보였다. 그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소의 유쾌한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 자기야! 나 거의 다 왔어. 찜닭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은데?”
[... 자기야.]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보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무슨 일 있었어. 당신 목소리, 지금 ‘연구 모드’도 아니고… 그냥, 되게 지쳐 보여. 혹시, 또 그 킥보드야?]
그녀의 정확한 추측에, 김경훈은 결국 긴장이 풀리며 웃어버렸다.
“와… 당신 진짜. 철학 박사가 아니라 점쟁이를 했어야 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당신 하루 이틀 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따뜻해졌다. [다쳤어? 탱고는?]
“아니, 안 다쳤어. 그냥…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어. 점자블록 위에 떡하니 지뢰를 매설해 놨더라고. 그리고 아까 인천에서 킥보드 사고 난 기사를 봤는데… 기분이 좀 그래. 이 도시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너무 위험한 곳 같아서.”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은 지옥이다’의 21세기 버전이지. ‘타인의 편리함은 나의 지옥이다.’]
그는 그녀의 철학적인 요약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알았어. 일단 빨리 와. 내가 오늘, 그 지옥에서 온 당신을 위해, 아주 특별한 ‘안주’를 준비해 놨으니까.]
“안주? ‘눌러 내린다’고? 내 이 분노를?” 그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니. 당신의 불안을. 아주 따뜻하고 맵고 단 걸로.]
5. 주석: 침범의 아키텍처
그가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을 때, 냄새가 그를 덮쳤다. 간장과 마늘, 고추, 그리고 닭고기가 어우러진,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집’의 냄새. 탱고가 하네스를 벗자마자 물그릇으로 달려갔고, 보보가 주방에서 달려 나와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진짜 안 다쳤어? 어디 부딪힌 데 없어?”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떤 시스템보다 더 확실한 안전망이었다.
“괜찮아.”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신 커피는 쏟았어. 한 6개월 전쯤에, 마음속으로.”
그녀는 그의 엉뚱한 말에 웃으며 그의 등을 툭 쳤다.
“알았으니까 앉아. 밥 먹자. 오늘은 특별히 당면 많이 넣었어. 당신이 좋아하는 넓적 당면으로.”
그는 식탁에 앉았다. 따뜻한 밥,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닭. 이것이야말로 그가 매일 지키려 했던, 그만의 ‘시스템’이었다. 그는 젓가락을 들며, 이 복잡한 하루에 대한 마지막 주석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제목: 침범의 아키텍처 (The Architecture of Trespass).
우리는 도시라는 공유 시스템 안에서 살아간다. 이 시스템은 상호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전동 킥보드는 이 아키텍처의 ‘버그’다. 그것은 ‘소리’라는 필수 데이터를 생성하지 않음으로써, 나 같은 비시각적 사용자에게는 ‘유령(Ghost)’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시스템에 접속하지 않은 채, 시스템의 자원(보도, 횡단보도)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약탈한다.
점자블록 위의 킥보드는 단순한 불법 주차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장애인의 정보 고속도로(Highway)를 파괴하는 명백한 ‘테러’ 행위다.
인천의 40대 남성은 ‘치상’ 혐의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시스템을 ‘침범’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가 그토록 편하게 ‘침범’할 수 있도록 방치한, 우리의 엉성한 도시 계획과 법률의 아키텍처 그 자체다.
결론: 우리는 ‘더 빠른 편의’를 숭배하느라, ‘더 안전한 공존’의 가치를 잊었다. 진정한 접근성이란, 단순히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최소한의 규칙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의 이 찜닭은 그 어떤 복잡한 시스템보다 완벽하다. 그것은 나의 허기(결핍)를 정확히 겨냥하고, 따뜻함과 포만감(충족)이라는 완벽한 해답을 제공한다. 보보라는 이름의 이 시스템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